‘정지용’을 숨겨야했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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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을 숨겨야했던 「호수」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8.11.0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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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의 장남 구관이 가장 좋아하였다던 「호수」.

그러나 「호수」는 발표된 이후 아니 정지용의 안부가 좌우익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지은이 없이 시(詩)만 쓰여진 채로 독자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정지용은 모순된 현실에서 자신의 이념적 가치를 굳게 지키기는커녕 그 가치를 측량할 겨를도 없이 이런 현실을 어처구니없이 맞이하고 말았다. 확장 해석하여 보면 현실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왕왕 일어나기도 하다. 안타깝다.

그러나 어쩌랴.

정지용도 현실세계에서 지나가는 바람을 다 막을 수 없었으니 그 바람 다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이는 「호수」에서 지은이가 삭제된 닫혀진 체계로의 현실 공간적 체험을 말함의 일종일 것이다.

정지용 자신은 이 상황을 알거나 혹은 몰랐음직도 하다. 그의 최후가 현재에도 우왕좌왕하니 우린 다만 이것들을 가만히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광복 이후의 민족문학 논쟁과 비평은 차후에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또한 좌익이니 우익이니 이러한 토설도 잠시 쉬어가도록 한다.

정지용이 월북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문학보다 이념이 우위를 점하던 시절, 그때 손거울에 ‘정지용’이라는 지은이 이름은 삭제된 채 「호수」만 적혀 시중에 판매되고 있었다.

당시 정구관도 「호수」가 아버지 정지용의 시였는지 몰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구관은 「호수」가 아버지 정지용의 시라는 것을 안 이후에도 정지용의 손자들에게 할아버지 정지용의 시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이는 정지용의 월북설이 가족에게 주는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 국학자료원, 2017, 225면 참조.)

「호수」는 1930년 5월 『시문학 2호에 「湖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된다. 이후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68면.)에 「湖水 1」로 제목을 바꾸어 싣게 된다. 이를 차례대로 당시 표기대로 적어본다. (두꺼운 글씨 표기는 필자 강조.)

湖水

얼골 하나

손바닥 둘

폭 가리지 만,
 

보고 시픈

湖水 만 하니

눈 감을 박게.


『 시문학』 2호( 1930. 5), 11면.

 

湖水 1

 

얼골 하나

손바닥 둘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68면.

 

『시문학에 발표한 「호수」는 1행에 5음절씩 모두 30음절로 고정하고 있다. 반면 『정지용 시집에서는 “보고 시픈 맘”이 “보고 싶은 마음”으로 6음절로 표기되며 1음절이 증가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박용철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의미의 명확성 등을 고려하여 수정하지 않았는지 유추가 가능해질 뿐이다. 다만 정지용이 『시문학에 발표할 당시 30음절로 운율 등을 고려하여 고정하였던 최초본에 마음이 더 끌릴 뿐이다.

그토록 독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전해진 「호수」는 정지용이 옥천 사람임과 충청도인만이 가지는 여유로움 그리고 조사나 어미를 띄어 씀으로 음보를 살려 미적 운율을 잘 이끌어 내고 있다.(「정지용의 「호수」 소고(小考)」, 국어국문학회, 2014, 109-130면.)

이렇게 지은이 정지용을 밝히지 못하고 독자들에게 읽히며 많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호수」. 그 「호수」는 현재 많은 이들에게 감흥을 주며 읽혀지고 있다. 정지용의 어느 시 보다도 더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작품이 읽히지 않는다면 종이와 잉크에 지나지 않”는다는 뿔레(George Pouler)의 말.

그 말처럼 작품 속의 글자를 읽고 내면화할 때, 즉 문학적 경험의 과정을 거칠 때 정지용의 「호수」처럼 비로소 문학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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