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 직제학 경재 ‘남수문(南秀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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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직제학 경재 ‘남수문(南秀文)’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11.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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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면(현 영동군) 박계리 상지동 출생
뛰어난 석학·문장가, 소상팔경시권 저자

을 조명하고 그들의 업적을 밝혀내는 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른 지침이 될 뿐 아니라 옥천에 대한 자부심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지는 이러한 뜻을 군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옥천의 역사 인물’에 대한 소개와 그 인물을 발굴 연구하고 집필한 과정을 보도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 남수문 선생 초상화.

△ 남수문 선생
남수문 선생은 옥천 출신의 문신이다. 조선시대 옥천군 남부지역의 명산인 비봉산 기슭 학산면(현 영동군) 박계리 상지동에서 1408년 태어났다. 집현전 직제학이었던 문장가 남수문(南秀文1408~1443) 선생의 호는 경재(敬齋)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약관 19세인 1426년(세종 8)에 사마시와 3년 마다 실시하는 정기 과거시험인 정시 대과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된 조선 초기 최고의 문장가 중 한분이다. 남수문 선생은 1433년(세종 15) 집현전부수찬에 올라, 동료인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 뒤 예문관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 경연검토관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재직 중에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시험인 문과 중시에 1436년(세종 18) 장원 급제해 그 해에 몇 품직을 뛰어 넘어 집현전 정자에 올랐다. 1442년(세종25) 3품인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집현전 학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 재직하면서 세종의 명을 받아 고려시대 통사 ‘고려사절요’의 초고(草稿) 대부분을 지었다. 또한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일본통신사의 친서를 짓기도 했다. 대표적 기문(記文)으로는 약관 22세에 왕명에 따라 지은 ‘태평관중수기’가 있다. 또한 세종 때 문장가로 문명을 떨친 경재(敬齋) 선생은 금산 ‘영벽루기’를 비롯 ‘순천객관기’, 세종시의 ‘독락정기’, ‘태안객관신창기’, ‘옥천향교신루기’ 등 지방의 객관기와 누기, 사제문 등과 함께 각종 서적 발행의 ‘발문’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 ‘서계’, ‘상소문’ 등 많은 명문을 남긴 당대 뛰어난 석학이며 문장가였다.

▲ 남수문 선생 동상.

△ 학문에 통달한 문장가
남수문 직제학은 학문적으로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통달하여 해박하였다. 또한 그는 박식하면서도 요약에 뛰어났고, 공부와 학문에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신석조(辛碩祖)와 권채(權採), 류의손(柳義孫)과 함께 집현전 선발해 참여했다. 이들은 문장과 덕망에서 모두 이름을 날렸지만 특히 남수문 직제학은 사물에 대한 논증에서 뛰어났다.
명현록(名賢錄) 기록에 의하면 남수문 선생은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났던 안자(顔子)에 비교하여 기록될 정도로 학문적 깊이와 문장에서 뛰어났다.
 

▲ 집필 전순표 향토사학자.

△ 그의 기록들
남수문 선생이 지은 ‘소상팔경시권’의 배경지는 중국의 소수와 상수 강이 합류하는 동정호 어귀인 소상팔경의 그림을 보고 아름다운 8곳의 절경과 감상을 노래한 한시이다.
“시인들의 시는 어찌 이리 묘하며(소인부영하묘)/ 화공들의 그림도 또한 정밀하구나(필력능용조화)/ 필력은 능히 조화를 이루었으니(필력능용조화)/ 소상팔경이 기둥에 걸려있네(소상권입해영)”는 소상팔경시권 일부다.

‘태평관중수기’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태평관을 중수한 목적과 새롭게 증축 및 개축한 각 건물의 규모 등 내역을 정리, 찬양한 기문으로 1429년 (세종11) 남수문 선생이 21세에 지은 것이다.

‘옥천향교신루기’는 세종24년(1442년)에 옥천 출신 송을개 옥천군수가 새로 옥천향교 남쪽에 9칸의 누각인 명륜당을 짓고 그에 대한 의의와 건축 과정 및 경과, 향교에서 배우는 여러 학생들이 열심히 면학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기문이다. 이 글은 건축 당시 옥천향교 훈도 이귀(李貴)의 서신 요청에 부응해 집현전 직제학으로 당대의 학문과 글재에 문명(文名)을 떨치던 남수문 직제학이 유려한 필력으로 쓴 문장으로 옥천향교 명륜당에 남아 있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문장(文章)이다.

‘독락정기’는  남수문 선생의 부친인 남금(南琴)의 친구인 임목(1371~1448) 목사가 관직을 마치고 낙향하여 고향 강기슭에 독락정 건립에 따른 의의를 쓴 기문으로 남수문 선생이 (세종 21)에 썼다.

이 밖에도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불교와 관련한 ‘세자빈에게 드리는 축문’이나 흥천사 사리탑 낙성식 때 지은 설선문인 ‘흥천사경찬회소문중설선문’ 등을 지었다.
권채와 함께 사가독서를 했던 남수문 선생은 ‘고려사절요’의 초고도 대부분 저술했다. 이 저서는 역사를 연월일 순서로 기록하는 편년체로 쓰인 책으로 지전체로 기록된 ‘고려사’와 함께 고려사 연구에 중요한 연구 자료다.

‘경재유고’의 편찬과 간행은 남수문의 후손이 집에 보관하던 시문과 ‘동문선’ 등에서 채록한 시문을 조선후기인 순조 때 활자로 간행한 것. 남수문의 시문은 사후 대부분 없어져서 그중 전(箋)· 기(記)· 묘지문 등의 몇 편만 ‘동문선’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 전순표 향토사학자 집필
전순표(63) 집필자는 “사는 동안 묻혀 있는 역사적 인물을 발굴해 많은 후학들에게 남겨 줌으로써 삶의 지표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나의 사명감이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그는 대전일보 기자 출신이며 향토전시관 명예관장으로 지역 시인이자 향토사학자로써 옥천향토유적보호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충북향토문화연구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옥천문화원 부원장을 역임하며 지용제 추진 및 여러 향토사 관련 연구 및 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2011년에는 옥천문인협회장 재임 시 옥천의 각 마을 이야기를 담아 시로 표현한 옥천의 마을시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초기 옥천 남부 지역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됐다.”며 “전국적인 역사를 조망하면서 옥천의 역사 인물을 재조명하는 일은 후손들의 자긍심뿐 아니라 옥천 지역민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큰 일조를 할 것”이라고 ‘옥천의 역사인물’ 발간에 대한 의미를 전했다.

또한 올 12월 조선시대 초기부터 근대까지 옥천의 역사 인물 중 금봉의, 송근수, 옥주 정닙. 오상규 선생이 쓴 한시를 발굴, 정리해서 이재하향토사연구회 회장, 충북도립대학 김종구 교수와 함께 단행본으로 펴낼 예정으로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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