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선비의 자세 후세에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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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선비의 자세 후세에 남기다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11.2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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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당한 이에게 음식 나누며 빈민구제성균관별시 장원급제, 삼척부사 등 관직 제수

△ 송정 전팽령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는 청백리에 선정된 전팽령 선생께서 살던 ‘반송대가’가 있는 곳이다. 양신정과 목담서원이 있고, 송정공의 아들 전엽의 효자비가 있다. 효자에 대한 설화가 담긴 호천이 있다. 옥천의 자랑인 청백리 전팽령 선생에 대한 행적과 그간 삶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송정 전팽령 선생은 1480년(조선 성종 11년) 11월 10일 옥천의 기사천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본관은 옥천이고, 자는 숙로이며, 호는 송정이다. 전오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석성현감 전효순이고, 아버지는 참판 전응경, 어머니는 좌사간 김사렴의 손녀로 김력의 딸이다. 기사천은 선생의 5세조인신 관성군공이 고려의 운이 기욺을 당하자 충신은 두 성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옥천으로 내려와 은둔하며 살게 된 것

△ 어린시절
전팽령은 1485년 6세가 되니 품성이 특출하고, 비범했으며 총명함이 빼어났다. 노는 것도 법도가 있었으니 지역의 원로들이 “모두 미루어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8세 때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소학을 공부하니 그르치지 않고 바르게 행동했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으며 스스로 힘써 공부하니 보는 자가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14세 때 둘째형을 쫓아 조현사에 올라가 중용의 심오한 뜻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1504년 25세 식년 생원에 합격하고, 또 관시와 별시 두 곳에서 연이어 장원으로 합격했다. 32세에는 장악원별시에서 장원급제 했다. 또한 1522년(43세)에 세종황제 가정 원년(조선중종 17년) 겨울에 성균관 별시에 장원급제 했다.

▲ 군서요어

△ 관직
1524년(45세) 봄 세자의 입학을 기념하여 별시 문과에 이효충 방 밑에 28명 중 3등으로 급제했다. 그해 3월21일 경주 훈도에 제수되어 5월에 경주로 부임해 경학을 가르치시니 유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경주에서 그 직이 만기가 되자, 다시 성주의 훈도에 제수 받아 부임하였을 때에 권간 김안노는 권력을 휘두르고 농락하였으나 그에 휘말리지 않고 항상 바르고 정직하게 처신하면서 두 마음을 품지 않았고, 올곧게 관직을 수행하였다. 1534년(55세) 겨울에는 성균관 사성에 올랐으나 권세 잡은 자들의 횡포에 어진 재상이 좌우에 있었다. 그러나 바르고 사리에 맞지 않은 말에 치우치지 않을 선생께서 은총을 입어 그 자리에 제수되었다. 1536년(57세) 봄에 사도시 정에 발탁되었고, 여름에는 단천군수에 부임하였다. 가을에는 이성의 동당에서 시관에 임명되어 공평정대하게 인재를 선택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으니 많은 선비들 간에도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다음해에 단천의 태수로 있으면서 성심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조처하여 그간에 있었던 온갖 폐단을 제거하였다. 이로 인하여 모든 백성들은 태평하게 살았다. 선생께서는 군정을 청렴하고 근검하게 운영하여 덕행으로 교화에 힘쓰니 고을이 안도하며 평안하게 되었다.

△ 공덕비
1542년(63세) 정월에 내자시를 경유하여 삼척부사에 제수되었다. 학문에 힘쓰고 인재를 훈육하니 이에 유학이 비로써 일어나고 읍풍이 크게 변화하여 동요와 민속에 “다 임금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함을 안다”라고 하였다. 삼척부사직(1542.3~1543.4)을 마치고 돌아오니 읍민들이 세워 주었다.

1548년봄 통례원의 좌통례에 취임하였다. 70세의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주목사에 제배되니 그 해가 흉년이 들어 사라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은 공적으로 주는 봉급을 헌납하고, 명하여 솥을 성의 밑에 벌려서 걸게 하고, 죽을 끓여 어려움을 당한 빈민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올바른 위민 치정을 실천함으로서 주민이 다 말하기를 “일만 입이 다 비문이니 어찌 석비가 필요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 옥천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

△ 옥천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 ‘전팽령’을 말하다
옥천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은 옥천의 역사인물 전팽령 선생에 관해서는 청백리상을 받았다는 것 외에는 연구 전까지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했다. 그에 대한 연구 과정을 통해 전팽령 선생이 관직에 있으면서 올곧은 선비로서 지역을 잘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깊이가 있어 공직자의 표상이고 옥천의 인물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옥천의 자랑스런 인물을 널리 알려 군민들이 우리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고자 집필하게 되었다고 의도를 밝혔다. 자료수집이 쉽지는 않았으나 전팽령 선생의 종중에서 문헌이나 자료정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와줬을 뿐 아니라 동이면 금암리 옥천 전씨 판서 공파 후손들의 적극적인 안내로 종중 선산에 선생의 묘와 묘비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또한 전팽령 선생의 아들 전엽이 살아생전 부모님을 잘 모시고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잘했다고 하사한 효자비 역시 눈으로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2011년 1집에 20명과 2018년 2집에 25명의 옥천 역사 인물을 우리 세대에 군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다”며 “옥천 군민과 후손들,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모든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빠진 분들 역시 3집, 4집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려 옥천이 역사 인물의 고장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묻혀 가는 인물을 잘 조명해 살아생전의 정신적 사상과 학문적 깊이를 계승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또한 이 회장은 “옥천의 역사인물 발굴을 통해 그들의 업적과 사상을 보호하고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장이 될 수 있는 역사인물 테마공원을 만든다면 후손들에게는 자부심이 되고 옥천의 자랑스런 유적지로 인물의 고장 옥천을 크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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