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 엄마의 매운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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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이야기> 엄마의 매운 손맛이 그립다
  • 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 승인 2018.11.2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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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수필가·지니카페 대표

어릴 적 이맘때면 집집마다 큰 시름이 있었다. 군불을 지필 장작을 준비하고 김장을 몇 포기를 하느냐 하면서 엄마는 월동 준비에 한숨소리가 커졌다. 11월 셋째 주면 슬슬 배추를 절이는 집들이 있고 대게 12월 초순이면 끝났다. 장작 나무를 그득하게 쌓아놓고 김칫독이 즐비하면 정말 등 따습고 배부르게 겨울을 보낼 것 같은 시대였다. 요즘은 절인 배추를 전화로 주문하곤 하지만 내가 어릴 적 당시는 몽땅 식구들 일이었다. 아버지는 가파른 언덕길에 배추와 무우를 짊어진 걸음이 빨랐다. 김장은 맛있는 음식을 저장해두고 겨우내 먹는다는 의미보다 생존해야 된다는 절발감이 더 강한 행사였다. 

농촌이 아니더라도 김장만큼은 품앗이의 전통이 도시에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백포기 이백포기가 보통이어서 일이 고되고 쓰이는 도구와 장비를 여럿이 모아서 쓸 수밖에 없었다. 채칼도 그렇고 배추를 절일 커다란 함지박도 여러 집이 돌려가며 써야 했다. 우물가나 펌프가 있는 마당에서 엄마들은 소금을 골고루 뿌리면서 왜 그러는지 김장 날만 잡으면 더 춥다고 투덜거린다. 우물가에서 엄마를 조금 도와준다고 있다 보면 햇볕은 쨍하게 펼쳐 있고 건조한 날씨인데도 콧물이 대롱거리고 코가 시렸다. 말하자면 진짜 김장 담글 분위기가 제대로 살아있다는 증거다. 마당 한쪽에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멸치 젖을 달였다. 큰 함지박과 대나무 소쿠리 채반에는 소금에 잘 절여진 배추가 담겨져 있다. 잘 다듬어 씻어 놓은 야채를 버무린 엄마한테서는 온갖 양념이 묻어 있는 빨간 손 뜨게 스웨터에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옷을 입고 머리엔 수건을 쓰고 추운 줄도 몰랐던 엄마의 쪽진 머리에도 고춧가루 같은 양념 냄새가 났다. 왜 그때 엄마들은 나이롱 스웨터를 입었을까? 그때 어느 집이 김장을 시작하면 동네 엄마들은 서로 도와 김장을 해서 서넛 이상 되는 자식들 배를 채워준 힘센 엄마들이다. 지금 김장철에 다시 그 모습 보고 싶어 목이 메인다.
김장이 끝나면 으레 굴을 곁들인 겉절이와 돼지고기 수육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 되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김장에 쓰이고 남은 무를 큼직하게 썰어 끓인 동태찌개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겉절이와 동태찌개를 어찌나 맛있고 맵게 먹었던지 헐어버린 입가가 더 쓰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잘 담가진 김치를 먼저 헐어서 먹을 순서를 정하고 장독대에 삽으로 언 땅을 푹푹 파서 독 묻을 자리를 마련했다. 이집 저집 남자들이 얼마나 자상하고 성실한가를 독 묻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타박하던 엄마의 모습도 생각난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아서 김장이 오래 못갈 것 같다는 엄마의 걱정이었다. 김장독 옆에는 설 때까지 먹을 무를 묻어 놓고 짚으로 덮어 주었다. 가끔 구덩이 속에 묻어 놓은 무우를 꺼내서 칼로 저며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받아 끓여준 무국의 맛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또한 어느 때는 무밥을 해서 양념간장에 비벼 먹던 그 맛도 잊을 수 없다.
춥고도 긴 겨울밤 새끼 꼬다 보면 엄마는 밤 찬으로 잔치 국수를 삶아 줬다. 그때 국수 위에 올려져 있던 김장 김치 그 맛을 보기 위해 맹추위에도 몸을 움츠리며 김칫독을 열어 살얼음 서걱거리는 김치 한포기를 꺼내 와야 했다.


그때 엄마의 소리가 들린다. “위에 것 꺼내지 말고 밑에 있는 걸로 꺼내 온나”.
그렇다 위에 있는 김치는 아무래도 맛이 덜해서 밑에서 갖은 양념이 배어있는 새콤하고 물이 흠뻑 젖어있는 김치를 내오라는 소리였다. 멸치 국물에다 국수를 말고 김장 김치를 넣어 깨소금과 참기름을 살짝 뿌려서 국수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그 밤에 먹던 국수 맛은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뭐니 뭐니 해도 김치의 매력은 발효와 숙성이다. 설이 지나고 나면 김장 김치가 너무 익어서 골마지가 끼고 군내가 나지만 찬물에 빨아서 무쳐 놓으면 아주 맛있는 새로운 김치가 되는 비밀이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김치의 유통기한은 법이 아니라 엄마가 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올해는 고추 값이 비싸고 배추가 싸다는 소문에 고추를 많이 사 놓았다.

하지만 갈수록 고추 값이 내려가는 것이 배추 값이 비싸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도 농사지은 분들의 한숨소리만큼은 안 들었으면 한다. 배추 값이 싸면 고추가 비싸고 마늘 등 양념값도 덩달아 비싸다는 생각을 하면서 올해 김장은 포기할까 했는데 마침 아는 분이 농사지은 거라고 배추와 무를 뽑아 가라는 연락이 왔다. 추워지는 날씨에 훈훈한 정을 느끼며 이번 주말에 엄마의 손맛을 생각하면서 김장을 해야겠다. 무채를 썰고 양념을 버무려 아주 어설프게 엄마를 도왔던 추억에 다시금 엄마 스웨터에서 나던 양념 냄새가 그리웠다. 김치 한쪽을 뚝 떼어서 입어 넣어주던 엄마의 사랑이 아마 내년 김장때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다시 엄마의 그 매운 손맛이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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