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라기 죽도 좋다” 참 교육자 ‘송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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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라기 죽도 좋다” 참 교육자 ‘송갑조’
  • 도복희기자
  • 승인 2018.12.0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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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을 길러낸 아버지
사마 양시 합격하고도 교육에만 전념

△ 수옹 송갑조의 삶과 품성
자가 원유이고 호가 수옹인 송갑조는 조선시대 숨은 유학자이자 후진양성에 헌신한 교육자로 본관은 은진이다. 1574년 만력 갑술 윤 12월10일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적십자병원 근처인 한양 반송방 유점동 서울 집에서 의빈부 도사, 증 좌찬성 송응기와 판서 정헌공 이윤경의 딸 정경부인 광주 이씨 사이에 5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곤궁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일생을 안빈낙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가정에서는 효우를 몸소 실천하였고, 사회에서는 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용납지 않는 곧은 선비였다. 비록 큰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위하고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붉은 마음은 그 어느 벼슬아치보다 더 강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자손들에게 이어져 마침내 우암 송시열 같은 동방의 큰 선비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 수옹 송갑조

△ 생애
수옹 송갑조는 어린 시절부터 얼굴이 단정하고 빼어나게 수려하며 살결이 옥설 같고 음성이 맑고 뚜렷하여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질 무렵 어머니 숙인 이씨가 타계해 유모 헌비의 보살핌으로 성장한 뒤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여섯 살 때 김근공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열한 살에 간이 최립에게 수업을 받았다. 수옹은 ‘중용’, ‘대학’, ‘논어’, ‘맹자’ 등 여러 경서를 수업함에 게을리 하지 않고 삼가 조심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1617년(광해군 9) 사마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적신 이이첨이 국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서궁으로 부르게 하고 수석합격자인 이영구도 정인홍의 가인 이방여 등과 함께 창의배소하여 제일 먼저 서궁에 가서 배알을 못하게 할 것을 진술하였다.

이때 수옹은 분연히 일어나 서궁으로 가서 사은숙배를 했다. 수옹은 이후부터 농촌에서 두문불출하고 세상에 뜻을 접고, 일상생활에서 여러 제자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을 일로 삼고 살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싸라기 죽도 먹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어도 즐거운 듯이 마음가는대로 유유히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수옹일기’가 있다. 관련 유적으로는 구룡촌에 유허비가 있고,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에는 그의 유모를 위해 아들 송시열이 세운 ‘유모헌비묘비’가 있다.

▲ 수옹일기

△ 인품
수옹은 자품이 엄중하고 기질이 굳세고 특수하여 어린시절에는 성질이 매우 조급했으나 만년에는 다시 너그럽고 온화함을 이루어 의형과 말씨에 나타났다. 무슨 일에 대하여서는 의리로써 결단을 하고, 맺고 끊음이 있어 그에게 함부로 범하지 못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성품은 어버이를 일찍 여읜바 부모가 살아있을 때 섬기는 일의 예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제사에 임하는 자세가 엄숙하고 공경스러워 아무리 엄동설한이라 하여도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형제간의 우애는 남달라 돈독하였고. 가족 사이에도 예절을 존중하였다.

▲ 송갑조 신도비

△ 교육관
수옹은 일생을 의의 정신으로 살면서 교육에 전념한 교육자였다.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간이 최립에게 수업을 받으면서부터다. 간이 최립에게 학문과 인격을 다듬고 나면서 선비가 일생 동안 해야 할 일중에 하나는 학문을 다듬고, 성정을 바르게 가르치는 데는 교육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신념을 확고히 한 것.

그는 절의에 의한 도덕적 용기로 서궁에 가서 독배를 하고서 즉시 시골 구룡촌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며 제자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것을 일로 삼고 살아갔다. 한편 그는 아들 송시열을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에게 이르기를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다. 그러므로 주자를 배우려거든 모름지기 율곡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느니라”라고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율곡 이이가 편찬한 ‘격몽요결’을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몸을 닦고 부모를 섬김의 요체가 이보다 더함이 없다고 했다.

수옹 송갑조는 타고난 효성스러운 선비였고 교육자였다. 평소 집에 있을 때는 하루종인 혹은 밤까지도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않으니 온 가족과 종들마저 두려워하여 시끄럽게 굴지 않으면서 항상 인륜을 강조했다. 그는 평생 평온하고 조용함을 스스로 지켰으므로 비록 벼슬은 낮은 자리에 머물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왔고, 시국을 슬퍼하고 시사를 논함에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나라의 신민으로서 나라를 위하고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조 있는 선비였으며 자녀 및 후진교육에 남달리 심혈을 기울인 교육자였던 것이다.

▲ 집필자 송백헌 교수가 수옹 송갑조 선생의 남긴 유일한 유품인 자작시를 들어 보였다.

△ 집필자-송백헌 교수
옥천의 역사인물 세 번째 이야기를 저술한 송백헌(84) 교수는 송갑조 선생의 직계자손이다. 지역 원로 국문학자이며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송백헌 명예교수는 대전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으로 얼마 전에 펴낸 ‘대전 예술 예인’, ‘삿포로에서 카사블랑카까지- 송백헌 여행기’ 외에도 ‘진실과 허구’, ‘한국근대역사소설 연구’ 등 40여권 저서가 있다.

송 교수는 “직계 후손으로 집안 어른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어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며 “가난했지만 확고한 교육이념으로 아들 우암 송시열을 길러낸 송갑조 선생의 학문과 생애에 대해 지금까지 깊이 있는 연구가 없음이 아쉬웠던 차 옥천군 향토사연구회 이재하 회장의 청탁으로 수옹의 가계와 생애 그의 인품과 교육철학 등에 대해 고찰할 수 있어 큰 보람이었다”고 전했다. 송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송갑조 선생의 유일한 유품을 꺼내 보이며 그의 인품에 대해 말없는 존경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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