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과 충절의 선비 동천 이충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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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과 충절의 선비 동천 이충범
  • 도복희기자
  • 승인 2019.01.0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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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동천유고’ 남긴 문필가
임진왜란 의병활동·후손은 항일운동

△ 동천 이충범 선생은?
임진왜란에 처하여 의병활동을 벌였다.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였다. 문집을 남겼을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어 양산의 환선루 주위 경관을 팔경시로 읊고, 환선루의 기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평생 익힌 학문을 시문으로 표현하고 충절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였으므로 그에게 선비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것 또한 합당하다.

△ 문필의 혈통
이충범은 본관이 인천, 자가 덕린, 호가 동천이다, 중종 경진(1520)에 태어나서 79세를 누리고 선조 무술(1594)에 별세하였다. 부인은 창신교위를 지낸 청도 김씨 창이다. ‘인천이씨대동보’에 따르면 이허겸이 시조로 등장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3세에 자연, 5세에 자현, 자겸, 7세에 인로 등 역사에 유명한 자손들이 줄을 잇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서로 유명한 ‘파한집’의 저자가 바로 이인로이다. 그는 시의 이론과 창작면에서 이규보와 쌍벽을 이루는 고려조 최고의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충범과 그의 자손들은 양산의 교육장인 자풍서당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이충범이 여러 벗들과 풍곡사가 있던 자리에 풍곡당을 지어 강학을 벌였다. 뒤에 한강 정구에 의해 자풍서당으로 개명하였는데, 이충범의 손자인 이운길이 중수하여 상량문을 짓고, 운영에 관한 당헌을 제정하며 서당의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지역의 인재 교육에 공헌하였다. 이후 인천 이씨 후손들은 자풍서당을 중심으로 지역의 학문을 일으키는데 중심역할을 맡아 왔다.

△ 충절의 가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조선이 처참하게 짓밟힐 때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금산에서 중봉 조헌이 일으킨 의병은 칠백의총의 유적으로 청사에 빛나고 있다. 인천 이씨 집안에서도 이에 호응하며 다섯 분이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한 집안에서 두 대에 걸쳐 의병으로 나선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문범과 시신, 충범과 시립은 부자 관계이고 시민은 조카다. 먼저 문범과 시신 부자가 의병활동으로 전사하고 난 후 그 뒤를 이어 충범이 아들 시립과 조카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뿐 아니라 넷째 동생 신범도 군량미 조달에 힘을 합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충렬사사적비’에는 두 분을 의사로 부르면서 한 집안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에 맞선 인천 이씨의 애국충절 정신은 당대로 끝나지 않았다. 그 고귀한 정신이 항일 독립만세 운동으로 다시 불꽃처럼 일어났던 것. ‘양산지’의 독립유공자 난에는 이광연(1872~1939)을 비롯하여 인천 이씨 인물로 이채연, 이상찬, 이봉연, 이택주, 이진국, 이낙연 등 7인이 등장한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분들이다.

△ 청렴 강직한 관직생활
이충범은 3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39세였던 1558년에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뽑혔다. 1560년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고, 복을 벗은 뒤 1563년 성환 찰방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뒤 기장 현감, 전적(1571), 경상 도사, 형조 좌랑(1572), 정랑(1573) 등을 역임하였다. 문과 급제자로서 3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었음에도 당상인 정3품에는 오르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를 ‘행장’에서는 그의 강직한 성격으로 보고 있다.

동천 이충범은 관직자의 수칙을 제시하고 이를 충실히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47세에 해남 현감이 되었다. 그 당시에 일곱 가지 실천 요목, 이른 바 ‘거관칠요’를 제정하여 자신을 성찰하였으며 이를 가훈 삼아 자손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첫째, 마음을 바르게 갖는다. 둘째, 자신을 청렴하게 다스린다. 셋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 넷째, 어른을 공경으로 섬긴다. 다섯째, 남과는 신의로 교제한다. 여섯째,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대한다. 일곱째, 일을 신중하게 처리한다. 이를 통해 자신을 바르고 청렴하게 단속하는 것을 바탕으로, 대인관계로 확장시켜 나아가는 점이 주목된다.

△ 동천유고의 글들
동천 이충범의 시문은 그의 문집인 ‘동천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동천유고’는 독립된 책으로 전해진다. 이 책은 변구일·이승현이 번역하여 영동문화원에서 2012년 양장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상편에는 부 2편과 시 133제 164수가, 하편에는 ‘의병을 일으킨 전말을 아뢰는 소장’과 ‘환선루’가 각각 실려 있다. 후에 모은 것으로 보이는 몇 편의 글이 ‘첨지’로 들어 있고, 부록에 ‘행장’, ‘발’, ‘충렬사사적비문’이 실려 있다. 시 작품을 시체별로 보면, 5언 절구가 10제 14수, 7언 절구 76제 98수, 5언 율시 25제 58수, 7언 율시 19제 21수, 기타 배율이 8수의 분포로 7언 절구의 작품을 특히 즐겨 지었음을 알 수 있다.

△ 환선루팔경시와 향토애
‘동천유고’에는 ‘환선루팔경’(113) 시와 ‘환선루기’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차강선대운’(66)과 ‘강선대’를 소재로 한 ‘견회’(36) 시도 있어 이충범이 환선대와 강선대에 관심이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충범은 ‘황선루기’ 첫머리에서 “옥천군은 호서의 빼어난 산수가 가득한 곳이고 양산현은 옥천에 소속된 현으로 아름다운 산수가 또 가득한 중에서도 가득한 곳”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환선루기’ 끝에서 “이곳이 한갓 놀이터로 전락되어서는 안 되며 후학들이 학문에 깨어있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는 시인의 심미안으로 명승지 혹은 명물 여덟 가지를 제재로 선정하고 제재마다 가장 적합한 특징을 포착하여 여덟 수의 팔경시를 짓게 된다. 1. 조령조운: 조령의 아침 구름 2. 음산모설: 음산의 저녁 눈 3. 서교낙조: 서교의 저녁노을 4. 북저귀안: 북쪽 물가의 돌아가는 기러기 5. 남강석애: 남산의 저녁 안개 6. 오포어화: 오포의 고기잡이 불 7. 용추세우: 용추의 가랑비 8. 선대추월: 선대의 가을 달.
신선의 고상한 흥취를 맛볼 수 있는 ‘환선루팔경시’, 시인은 이를 통해 풍류 인사들에게 환선루 탐방의 초대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풍광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곳 출신 이충범이라는 시인을 만나게 됨으로서 양산은 신선의 놀이터로 그 격조가 한층 달라진다.

▲집필 김선기 명예교수

△ 집필- 충남대 김선기 명예교수
충남대 김선기 명예교수는 지난 여름 내내 이충범 연구에 몰두했다. 원래 옥천 출신 충남대학교 박우훈 한문학과 교수가 집필하기로 돼 있었는데 큰 병을 얻은 후배의 부탁을 받고, 옥천향토사학회 이재하 회장의 집필 의뢰를 수락하게 되었다. 김선기 교수는 고전시가로 문학박사를 받고 충남대학교 박물관장, 도서관장, 인문대학장 어문연구회장, 한국어문학회 회장, 동방시화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충남대 명예교수로 있다.

김 교수는 “이충범의 문집 동천유고를 통해 글을 쓸 수 있었다”며 “글은 남겨져야 선조들이 살아온 정신의 맥을 이어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충범 선생에 대해 집필하고 나서 그 자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분의 삶에 대해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전했다.

이충범은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한 이인로의 후손이다. 그 후손들 역시 3대가 문과급제를 한 학자의 집안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이충범 부자, 그 형의 부자, 조카에 이르기까지 총 5명이 의병 활동을 한다. 3.1운동 때는 그 후손들이 다시 양산에서 항일의거에 참여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김 교수는 이러한 사실에 입각해 제목을 ‘문필과 충절의 선비 동천 이충범’으로 정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들은 독립훈장을 받게 된다. 한편 이충범 선생은 강선대 맞은편에 환선루를 지어 ‘양산 8경’을 노래한다. 이곳은 혼자 즐기는 곳이 아니라 지역민의 교육의 장이자 공유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환선루가 보존되어 있지 않다.
김선기 교수는 “환선루가 개인의 누가 아니라 지역민의 교육의 장이자 풍류의 장소라면 지역의 문화행사 차원에서 환선루를 재현해 지역의 역사문화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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