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는 전설의 샘일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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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는 전설의 샘일지 모를
  • 박은주 시인
  • 승인 2019.01.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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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시인

우리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신비한 샘을 찾아다녔다. 그곳은 한 겨울에도 따뜻한 물이 솟고 아무도 굶지 않을 만큼 넉넉한 먹이가 있다고 했다. 사시사철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맴도니 먹이를 얻기 위해 피땀 흘리며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것을 그대로 믿지 않았지만 희망을 버리지도 않았다. 망망대해를 지나 비와 바람을 뚫고 날개가 뻐근해질 때까지 전설의 샘을 찾아다녔다.

그런 곳이 정말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샘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물고기가 넉넉하고,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풀숲이 모래톱과 함께 이어져있었다. 겨울이면 물안개가 피어올라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칼바람에 강물이 꽁꽁 얼어도 샘이 있는 곳부터는 조금도 얼지 않아 얼음과 따뜻한 물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얼음 위에 나란히 서서 다리를 쉬고 날개를 손질하며 반짝이는 물비늘을 바라보는 순간이 행복이었다.

우리는 바람을 쫓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새들의 천국에 와있는데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있을까. 강을 따라 펼쳐진 넓은 초원이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도 좋았다. 전설을 찾아 많은 새들이 날아왔다.

우리처럼 하얀 깃털을 가진 백조도 만났고 청둥오리, 원앙도 날아와 함께 물고기를 사냥했다. 가끔 가마우지 떼가 찾아와 머물기도 했다. 바다에서 거슬러 와 쉬었다 가는 갈매기도 있었다. 작은 새들이 많이 있으니 건너편 산에 솔개가 살기 시작했다. 흰꼬리수리가 나타난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누구에게는 전설의 샘일지 모를 하수종말처리장 옆을 지난다. 냄새가 지독하다. 한여름에는 뜨거운 기온과 바람 한 점 없이 정체된 공기와 맞물려 지날 때 마다 곤혹스럽다. 그래도 내게는 먹이사냥에 집중하는 오리가 보이고 풀숲에 앉아 깃털을 손질하는 왜가리가 보인다.

주민들의 악취 민원이 많아 시설을 이전한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조원이 넘는 사업비를 조성하여 이전을 추진한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새들이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몇 세대가 지나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어쩌면 새로 건설되는 하수처리장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들이 도시개발에 밀려 쫓겨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똑같은 기사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땅값과 집값이 오를 것이라며 숫자를 계산하기 바빴다. 악취로 인한 피해도 심각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고, 개발을 위한 선택과 집중도 당연한 일이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은 현대아울렛 건설을 위해 기초공사를 다지고 있는 3만평의 부지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은 10년 넘게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다. 울창한 넝쿨에 덮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나고 주변은 잡초로 무성했다. 어느 새벽 고라니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담장 아래 구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근처에 너구리, 족제비, 두더지를 비롯해 작은 새들이 살아도 고라니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명품 프리미엄 아울렛 예정부지’라는 현수막이 펜스를 따라 펄럭일 때 나는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걱정되었다. 이제 떠나라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새 보금자리를 찾아주지도 않을 텐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금은 여러 대의 포클레인이 땅을 깊이 파고 있다. 억새도 대부분 잘려나갔다. 내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그저 살아있던 순하고 착한 동물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지구 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이재민이나 난민과 닮아서 더 마음 아픈지 모른다. 지진과 태풍으로, 민족 간 분쟁이나 내란으로 어쩔 수 없이 쫓겨나야하는 사람들. 사회적,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무조건 포용할 수도 없고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다지만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닌,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현실도 누군가에게는 천국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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