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론 인형을 떠올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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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론 인형을 떠올리다(2)
  • 조세원 대전 가톨릭문학회 사무국장
  • 승인 2019.01.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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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원 대전 가톨릭문학회 사무국장

아이들의 행동도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의 체험판처럼 다가왔다. 처음에는 “내가 엄마 119야. 엄마가 ‘아야’하고 말하면 내가 ‘웨엥웨엥’하면서 달려올 거야.” 하던 큰아들이 해주던 설거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동생에게 미루는 일이 많아졌다.

“하기 싫으면 놔둬! 거봐라. 얼마나 가나 했다.” 하며 냉정하게 쏘아붙이고 입을 앙다물고 오랜 시간에 걸쳐 설거지를 하고 나면, ‘뭐 사는 게 이래!’하며 억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점차 외출을 하지 않고 집안에 머물렀다. ‘팔을 다쳤으니, 이제 조금 쉬어가라는 건가보다. 이 시간에 읽지 못한 책을 실컷 읽어야지’했던 결심은 뒤로 가고, 내 손에선 인터넷 쇼핑 화면이 점령한 핸드폰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휴식도 아닌, 견디는 시간을 지나고 드디어 깁스를 풀게 되었다. ‘그대로 두면 그 상태로 뼈가 굳을 수 있으니 아프더라도 지금 풀고 지켜보자’는 의사선생님의 의도였다. 괜찮았다. 불편함의 상징처럼 느껴졌던 깁스만 풀더라도 살 것 같았다. 깁스를 풀자마자 목욕을 하며 묵은 때를 닦아냈다.

아픈 게 채 가시지 않은 또 한 주가 흐르고 있다. 회복은 아주 더디다. 하지만 매일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느새 조금 삐뚤기는 하지만 머리를 묶을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불편하지만 운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금처럼 양손으로 자판을 쳐서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성당 홍보분과 연수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담당 신부님이 기타를 치시며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신부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제가 이렇게 기타를 다시 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몇 달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왼팔을 크게 다쳤는데 팔꿈치를 접고 펼 수도 없었거든요. 물론 기타 코드를 잡을 수도 없었지요. 아주 불편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지금 이렇게 기타를 다시 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다시 할 수 있는 지금에,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난 마음속으로 외쳤다.

‘신부님, 공감합니다! 백퍼센트 공감합니다!’ 그렇다. 아프고 불편한 동안에는 몰랐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지금이 되니 깨닫게 된 것이 많이 있음을 느낀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몸을 움직여 사고를 유발한 것과 마론 인형에 대한 엉뚱한 상상까지 동원하며 불편함에 조급증을 부린 것은 잘못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아픔도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살아 있는 생명력으로 아픔에서 벗어나 회복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정상인 몸과 평상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몸의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 그 중에 왼팔은 무지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
아프고 힘들긴 했지만 내게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느 정도 지난 지금에서야 그것을 안다. 아픔에 빠져 있었을 때는 모든 것이 부정이고 원망이었지만 점차 나아지면서 다시금 행복과 감사를 느낀다.

누군가가 들려준 꿩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꿩은 사냥꾼에게 도망가다가 궁지에 몰리면 머리만 나뭇잎 더미에 푹 넣는단다. 그러면 사냥꾼이 자기를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나? 고스란히 보이는 몸뚱이는 모르고 머리만 가리면 다 숨은 것이라 착각하는 꿩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그 모습이 꼭 숨기려 하지만 여실히 드러나고 마는 내 어리석음 같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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