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공유물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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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의 공유물 길상사
  • 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 승인 2019.02.1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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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지금의 길상사 절 부지는 김영한 씨의 소유물을 법정스님께 시주하면서 길상사의 명칭으로 건설된 건물이다.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 씨는16세 때 삯바느질로 다섯 자녀를 먹여 살리는 홀어머니의 고생을 지켜보다 못해 조선권번에 들어가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 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고 서울 장안 한량들의 애를 태우던 사교계의 꽃이었다. 김영한은 월북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져 동거를 했다. 그리고 해방 후 부자 동네에 직접 요정이 생긴 것이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말까지 대원각. 청운각. 삼청각은 서울장안의 최고급 요정으로써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는 말이 무성할 만큼 밀실의 정치에 이용됐던 곳이다.
서울성북동 대원각 소유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책을 읽고서 감동이 되어 법정스님께 시주의 뜻을 밝혔으나 법정스님은 무소유 개념을 내세워 10년 동안이나 거절해오다. 시대의 인연이라는 측면에서 김영한의 뜻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워낙 고가의 땅이었으며 김 영한 씨의 ‘시주’로 창건된 것이다. 법정은 개원식 인사말에서 “이 기회에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절은 어떤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종단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이다”를 피력했다.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있는 현실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편안함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법정은 흔들림 없이 준비해온 법문을 읽었다. 1997년 12월 14일 법정의 창건 법문은 길상사의 문을 열었다.

개원식에서 김영한 씨는 시종 감격에 의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말을 했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아무것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를 모시게 돼서 한없이 기쁩니다. 저의 남은 한으로 이 절의 종을 힘껏 치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법정은 그녀에게 염주 한 벌을 선물했다. 그녀는 평범한 염주 한 벌을 정성스레 쓰다듬으며 소녀처럼 좋아했다. 길상사 창건은 말이 많았다. 길상사의 부지는 김영한 씨가 가지고 있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이기도 하지만 워낙 고가의 땅 이였다. 김영한 씨가 법정에게 시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1987년 스님이라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법정은 그러나 무소유의 수행질서를 내세우며 한사코 사양하다. 1996년 “이것도 시절 인연이니 할 수 없다”며 시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길상사의 개원에는 김수환 추기경. 천주교 춘천 교구장 장익 등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참석 했으며 주일미사가 있는 날이지만 기꺼이 참석해주신 감사에 답으로 법정스님은 이듬해 2월 명동성당을 찾아 연사로 나서 자비의 법문을 읽었다. 법정은 후일 길상사의 창건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 시주의 갸륵한 뜻으로 길상사를 세워 개원하던 날 나는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요즘 절과 교회가 호화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고있는 현실에서 이 절만은 가난하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청정한 도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사석에서 몇 차례 밝힌 바 있듯이 내 자신은 사주의 뜻을 받아들여 절을 일으키는 일로서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운영은 이 절에 몸 담아 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절을 세우는 데에 함께 동참한 크고 작은 시주들에게 나는 늘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에서 기꺼이 참여한 시주의 공덕은 이 도량이 존속 되는 한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절은 어떤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종단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이다.

법정의 말처럼 절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더더군다나 절은 무소유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법정스님의 것도 아니었다. 흙탕물에서도 연꽃은 피고 요정이었던 곳에도 길상사는 창건되었다. 이러한 정신이 수 천 년을 이어온 불교의 정신이기도 한 것이라고 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 의지를 갖고 가야 자신의 삶이 개선된다고 했다. 절에 사는 스님들과 신도들도 저마다 삶이 맑고 향기로운가 그렇게 개선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마음은 개인의 청정과 진실을 말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의 사회적 영향력 메아리이며 도량에서 익히고 닦은 정진의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이웃에게 어떤 기여를 하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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