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인정하는 사회…옥천발전의 토대”
상태바
“상대를 인정하는 사회…옥천발전의 토대”
  • 임요준기자
  • 승인 2019.02.14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 1호 ‘동화약국’ 개업…약사·정치가·예술가의 삶
옥천예총·사진작가협회 설립…“예술은 곧 인간미”

옥천 마성산 줄기자락에 늙을 노(老) 별 성(星)의 노성산이 있다. 노성산과 가장 가까운 곳 수북리 작은 옛집, 그곳이 정진철(81) 전 도의원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호(號) 성산이 노자를 제외한 바로 여기서 왔다. 옥천읍장을 지낸 아버지 故 정기우 선생과 어머니 故 이창임 여사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생을 정직 하나로 공직자의 삶을 산 부친의 영향으로 정 전 도의원은 올곧은 성품을 지녔다. 그래서 인지 그에게선 정치인보단 카메라앵글에 자연과 인생을 담는 사진예술인이란 게 더 어울린 듯하다. 옥천에 첫 1호 약국을 개업한 군민 건강지킴이에서 지역사회 봉사자로, 정치가로,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온 정 전 도의원. 생전의 모친과 아내 정화자(78) 여사를 위해 선사공원 옆 강변에 마당이 있는 주택을 마련했다. 이곳까지 돌아오는데 70년이 걸렸다는 그의 말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 하다. 서예와 미술활동으로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는 그의 아내의 호는 황곡이다. 거실 창 넘어 살색의 넓게 깔린 잔디밭 끝 담벼락에 서너그루 솔잎이 유난히 새파랗다. 겨울 햇빛에 넘실대는 강물이 바라다 보이는 그의 저택에서 옥천의 희망을 담았다.

- 약학대를 진학하셨죠?
해방과 전쟁의 어린 시절(죽향초‧옥천중‧옥천농고 졸업)은 혼란기였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친께서는 법대를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의대를 가고 싶었다. 의대는 6년제인데다 지방대에는 없어서 집안형편 상 의대를 포기하고 1년 재수해서 막 신설된 충북대 약학과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 약학과는 농과대 소속이었어. 졸업하고 옥천군에서는 최초로 약국을 개업했다. 동화약국이다. 1호 약국인 셈이지. 충북연감에도 소개돼 있다. 지금도 동화약국 간판이 있어 자랑스럽다.

-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셨다는데
보건업 종사자들은 의사, 약사, 수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이런 사람이 주였다. 3대 기관이라면 군청, 경찰서, 교육청인데 이 기관들도 의사는 부려먹을 수 없어서 민간인으로 보좌역할 하는데 만만한 게 약사였지. 약장사 취급했거든. 그러기도 하고 내 지역 살면서 도와달라고 손 내밀어서 도왔다. 검찰청, 법원에서까지 해주기를 바라며 묻지도 않고 명단에 넣었다. 그러다보니 안 끼는 곳 없이 자의반 타의반 지역에 살면서 안 할 수도 없었다. 옥천중학교 총동창회장을 3대에 걸쳐 하고 법원에서도 30년 조정위원, 검찰청 선도위원 30년을 하고 자진해서 그만뒀다.

- 도의원 출마 계기는요?
나는 정치하고는 잘 안 맞어. 성격상 여러 가지가...말한 것처럼 자의반 타의반 별거 다 했다. 신협 이사장도 10년을 했다. 박준병 국회의원 당시 동남3군 부위원장을 했다. 1991년 지방자치가 부활되면서 당시 안철호 사무장을 포함해 나와 가까이 있던 5인이 도의원에 출마했다. 박 의원님은 떠오른 핵 잠수함과 같아서 그 정치적 바람으로 3명이 당선됐다. 하지만 나 같은 성격에는 맞지 않았어. 선친께서도 옥천읍장을 퇴임하고 초대 대의원에 출마했지만 낙마했다. 정보부에서 나오라 하면 나와야 했던 시절이었어.

- 재선에선 낙선하셨죠
두 번째에는 낙선했지. 3명 모두 떨어졌어. 외환위기가 정치적 바람을 탔다. 이때 정치를 그만뒀다. 안 맞았다. 선거운동 때 표어로 이름자를 풀어서 ‘(정)정직하고 (진)진실하며 (철)철저한 봉사자’라고 했지만 도의회 가보닌까 정직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더라. 깡패 같은 사람이 더 맞다. 욕하고 거짓말하고 말 잘하고 공갈칠 줄 알고 아우성도 치고...그런 사람이 어울리는 것. 초선 경험을 살려 더 하고자 했지만 낙선한 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회의를 많이 느꼈다. 한번 발 들여놓으면 빼기도 힘들다. 유권자들은 밥을 사줘도 표 달라는 것으로 생각하더라. 값어치 없게 됐다. 어딜 가더라도 정치적으로만 본다. 활동하기가 지랄 같더라. 그러다보니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정치와 거리가 있는 예술이었다.

- 왜 그렇게 옥천예총 설립에 집념을 보이셨나요?
옥천문화를 꽃 피울 수 있는 방법은 각 동호회 활성화라고 생각했다. 옥천의 문화단체를 쭉 써내려 가는데 사진동호회가 없었다. 선친께서 공보실장에 계실 때 사진기를 빌려서 찍기도 한 경험이 있어서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없어서 청주지부에 있는 죽향초 5년 후배인 조영상을 고문으로 모시고 동호회를 결성했다. 1980년대 초로 기억한다. 기름을 조금만 부어도 불붙는 상황이었다. 10월 중봉충렬제에 사진전시를 목표로 열심히 시작했다. 사진작가협회를 조직하기 위해선 작가는 입상을 해 총 30점을 따야한다. 최소 3년이 걸린다. 군 단위에서 협회를 만들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악착같이 했다. 오죽하면 전국전시회 나가면 ‘옥천놈들, 옥천놈들’ 했겠나. 드디어 1999년에 협회가 만들어졌다. 군 단위로는 부여 다음이었다. 보은, 영동은 지금도 없다. 사진작가협회가 만들어지고 다음해인 2000년 옥천예총이 출범했다. 도의원 중 예술인은 나 혼자 뿐이었다. 도의회 사무실에도, 도지사실 앞에도 내가 직접 찍은 백두산 천지 사진이 걸렸다. 우리 선조들은 낙향하면서 하는 일은 후학양성이다. 나도 그런 것을 생각했다. 예총 만드는 것이 바로 후학양성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 옥천예총의 현 사태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 나이 되닌까 사회활동 하는데도 제약이 있다. 내 앞에서 담배도 못 피우고 50대도 자식 같으니...말도 함부로 못하고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예총 회의에 잘 나가지 않았다. 전시회 있으면 잠깐 나가고 공식회의는 안 갔다. 잘하겠지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터져서 안타깝다. 1월 총회 때 나가서 발언은 안했지만 새로운 기틀 마련하는데 지켜봤다. 아픔을 겪었으니 나아질 것이다. 신임회장도 선출됐으니 지켜보려고 한다. 책임감을 느낀다.

- 옥천이 발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요?
요새 돌아가는 것 보면 극과 극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극좌와 극우가 서로를 ‘나쁜 놈’이라고 한다. 충돌이 심해 참 시끄럽다. 사람이 각자 얼굴이 다르듯이 극좌, 극우, 중도도 있고 사고방식이 다르지만 나쁜 놈으로 하면 피차 안 된다. 중도에 있는 자를 시원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됐다.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 정부가 잘하는 것은 칭찬하고 여야 할 것 없이 상대당이 잘하는 것은 손뼉도 쳐줘야 한다. 

- 끝으로 군민에게 하고픈 말씀은...
예술이라는 글자는 예에 기술이라고 해석한다. 예술의 경지에 오르면 사람이 그만한 수준에 올라간다. 기술이 그만큼 올라간다. 지금 정보화 사회에선 뒤를 볼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는 시대에 조금은 뒷짐 지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하늘도 쳐다볼 수 있는 측면이 예술이다. 인간적인 미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예술이다. 인간의 미를 찾는 것이 예술이다. 인간적 방법을 찾는 것이 예술이다. 시대가 삭막하다. 하늘도 산도 미도 추구할 수 있는 예쪽에 관심을 가져야할 시대적 요청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