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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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타고 있어요
  • 박은주 시인
  • 승인 2019.03.1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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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시인

월요일 아침 출근길은 다른 날보다 차가 많이 막힌다. 금요일 퇴근길과 쌍을 이루며 불법과 소음이 도로를 가득 채운다. 오늘도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과 씨름하며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나왔다. 아침을 몇 숟갈 챙겨 먹었어도 기운이 없어 정류장에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내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이 왜 금요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흰색 SUV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더니 앞차와 거의 부딪칠 뻔하며 좌회전 차선에 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뒤쪽 차량에서 경적소리를 요란하게 울렸고, 운전사는 창문을 열고 욕설을 쏟아냈다.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진입하기 위해 가장자리에 서 있었으므로 흰색 SUV의 뒷모습이 잘 보였다. 유리창에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고 예쁜 손글씨로 장식된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붙여놓은 것일까 궁금했다.

‘초보운전’ 스티커는 뒤쪽에서 오는 운전사에게 경고하는 의미가 있어서 부착할 필요가 있지만, ‘아이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를 왜 뒷유리에 붙이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이가 타고 있는 그 차의 운전자가 수시로 볼 수 있도록 앞 유리창에 붙여야 하지 않을까. 내 아이가 나를 보고 있으니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말할 때도 주의하도록 자기 자신을 상기시키기 위해 붙여야 할 것이다.

뒤통수에 스티커를 철썩 붙여놓고 아이가 보든 말든 신호를 위반하고, 위험하게 운전하며 전화하느라 정신없는 사람들도 많다. 다른 운전자가 실수라도 하면 어김없이 욕을 내뱉는다. 자신이 먼저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스티커는 그저 ‘내 아이가 타고 있으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니면 그냥 장식으로 붙여놓는 이름 그대로의 스티커에 불과하다.

스티커를 내보이듯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정작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럴듯한 가면을 붙이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다른 것은 보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서 보여줄 수 있는 일에만 급급하니 일 처리에 빈틈이 많아진다. 누군가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은 보지 못한다.

타인을 섬기는 일부터 해야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인정받을 수 있는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오로지 윗사람에게만 친절하다. 마음에 없는 친절을 베풀고 나면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랫사람에게는 강압적이고 무시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아랫사람이 해놓은 일이어도 자신의 공로로 알아주지 않으면 그 화를 다시 만만한 사람에게 풀어놓는다.

나라 안에서 온통 보여주기식 행정이 만연하고 있으니 그런 사람이 많다고 해도 새삼스레 문제될 것도 없지만 그로 인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몹시 안타깝다. 뒤통수에 붙인 스티커가 나는 잘못이 없고 모든 것은 당신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내면을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자신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면 밖에 붙일 것이 아니라 안에 붙여야 한다. ‘내 아이가 타고 있다’ 라든가 ‘내 아이가 보고 있다’라는 문구를 운전자가 볼 수 있는 곳에 붙이면 어떨까. 내실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외양만 쫓다가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은 사람들과 그런 사람을 묵인하는 사회에서는 믿음이 자랄 수 없다. 아침의 그 스티커는 내게 다른 사실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안에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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