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붓을 잡아 본 지 오래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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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붓을 잡아 본 지 오래 되어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2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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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 문학평론가

정지용은 1946년 8월 26일 『현대일보』에 「尹石重童謠集 「초생달」」을 실으며 “하도 붓을 잡아 본 지 오래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정지용은 해방 전후 거의 절필을 한다. 1942년에 「窓」, 「異土」, 1945년 「산 넘어 저쪽」, 1946년 「애국의 노래」, 「그대들 돌아오시니」, 「追悼歌」 등의 단출한 시를 발표할 뿐이다.
시적 언어제조기였던 정지용에게 해방 전후는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생활에서 오는 궁핍과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이념의 갈등과 혼란 그리고 계급적 표방들이 그를 괴로움에 휩싸이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인이 원하던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이라는 공간은 “식민지하의 문학 특히 친일 어용문학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민족 문학의 건설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김재홍, 「역사적 굴곡과 대항 논리의 시」, 『한국문학 50년』, 문학사상사, 1995, 53면)하게 되었다.
이숭원은 「민족의 시련과 서정시의 맥락」(위의 책, 79면)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재고하고 있다.

온 민족이 만세의 절규로 맞이한 해방은, 미국군과 소련군의 주둔에 의한 국토의 분단, 이념의 대립에 의한 민족의 분열, 그것의 연장인 동족간의 처절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 다가온 광복의 환희는 그 안에 민족의 시련과 고초를 이미 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의 그날부터 정치 세력은 자기들 조직의 간판을 내걸기 시작했고 문인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 난지 한 달도 안 되어 문단은 좌우의 두 패로 나누어졌으며, 문인들은 자의건 타의건 어느 단체의 일원으로 소속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이듬에 이 두 집단은 ‘조선 문학가 동맹’과 ‘전 조선 문필가 협회’로 양분되어, 전국적 규모의 집회를 열고 공식적인 단체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그리고 김외곤은 「해방 공간의 민족 문학 논쟁과 카프의 문학 이념」(위의 책, 360-361면)에서 당시의 뒤숭숭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당시의 정치 운동이 다양한 세력으로 나누어져 분열상을 드러낸 것처럼 문학 운동 역시 단일한 단체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어 있으면서 각기 다른 민족 문학론을 주장하게 된다. 여러 문학 단체 가운데 제일 먼저 조직된 것은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에 결성된 ‘조선 문학 건설 본부’(이하 ‘문건’)이다. (중략)
문학 이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임 화, 김남천 등의 ‘카프(KAPF)’ 출신이 중심이 되어 이태준·김기림·정지용 등 소위 순수 문학인들까지 포함된 광범위한 문학인들의 연합체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연합체적 성격 때문에 이 단체는 곧 다른 문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비난 세력은 주로 같은 카프 출신이면서도 문건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문건의 이념이 지닌 연합적 성격의 타협적인 면을 비판하고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의 독자적 계급성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문건이 결성된 지 한 달 만인 9월 17일에 따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이하 ‘프로 문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중략)
문건과 프로 문맹의 분열은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헌영이 중심이 된 조선 공산당의 적극적 중재하에 ‘조선 문학가 동맹(이하 문학가 동맹’)으로의 통합 과정을 밟는다.(중략)
그러나 두 단체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프로 문맹의 핵심 분자들은 대부분 문학가 동맹에 가담하지 않고 월북의 길을 택하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문학가 동맹의 이념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었던 역사 앞에서 붓마저 자유롭게 들 수 없었던 정지용.
월북의 굴레를 씌워, 족쇄를 채워 놓았던 세월.
그의 최후에 대한 궁금증은 세월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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