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진 개척한 사육신 김문기 선생
상태바
6진 개척한 사육신 김문기 선생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3.21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3월 21일은 사육신 김문기 선생의 충의정신을 기리는 563주기 추모제향일이다.
우리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김종서 장군은 물론 만고충신이며 우리 고장 출신이신 사육신 김문기 선생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는 조선 초기 함길도 군사책임자로 6진 개척과 변방을 굳건히 지켜, 함경도와 두만강 유역의 영토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백촌 김문기 선생은 문무를 겸비한 국방전략가이며 충신으로 단종 복위운동의 영도자이다. 본관은 김녕, 증영의정 김관의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서 1409년(태종 9)에 출생했다.
그는 1426년(세종 8) 27세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남수문 선생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처음 관직으로 예문관 검열을 시작, 사간원 좌헌납를 거쳐 1437년 38세에 병조정랑, 1449년 세종 말년에 병조참의에 올라 군사 관련 주요 직책을 맡는다.
1451년(문종 1년) 1월 둔전제를 왕께 건의하니,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어전회의에서 김종서 등 대신들과 둔전 설치, 가뭄 대비 제방 쌓기 두만강의 6진 대책 등 국방 관련 군사회의를 마치고 1년 10개월 동안 재임한다. 그는 함길도에 부임, 두만강의 6진을 더욱 공고히 하여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다. 또 둔전제를 위해 삼남 지방 백성을 함길도 국경지대로 이주시켜 평시에 농사를 짓다가 여진족의 침입이 있을 때는 창칼을 들고 나가 야인들을 물리쳤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자, 왕의 비서격인 동부승지 등 주요 직책을 맡아 왕을 보좌했, 국방 중책을 맡아 함길도관찰사,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단종 2년 형조참판으로 국가 기강을 확립하였다. 그는 1455년 단종 3년에 공조판서와 삼군도진무를 겸임하였다. ≪방백한시(放白鷴詩)≫는 1455년 함길도절제사 시절, 계유정란 소식을 접하고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 충정과 변방에 갇혀 주군을 지키지 못한 괴로움과 고향 옥천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심사를 표현했다.

그대는 새장 속의 새이고 나 외로이 갇히어,
해 저문 창가에서 시름을 같이 하네
어찌 구름 밖 천리를 날고 싶지 않으랴만,
장 속에서 헛되어 십년 세월을 버리는구나

고향은 멀리 하늘 끝에 아득하고, 
벽해는 아스라이 땅 끝에 망망하니     
함께 가고파도 갈 수 없는 몸이기에, 
차디찬 눈보라를 견디어 머무리니    

1456년 일가인 대전 출신인 박팽년과 성삼문, 하위지,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단종복위를 모의하며 그 지도자로 군사 동원의 책임을 맡았으나, 사전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순절한 사육신이다.
그의 순절 261년 후 숙종 때 후손 김이휘가 대궐 문루에 올라 ‘둥! 둥! 둥!’ 신문고를 울려 억울함을 호소했고, 영조 때 후손 김정구가 다시 탄원, 신원과 관작이 이조판서 겸 도총관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정조 때 충의(忠毅) 시호와 정조 5년 좌찬성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어 고향인 옥천 이원 백지리에 유허비와 단종 장릉 충신단에 배향된다. 1977년 <조선왕조실록>, <숙모지> 등의 고증에 의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단종 때 사육신으로 판결되었고 1978년 노량진 사육신 묘역과 의절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고향인 옥천 이원 백지리에 2017년 3월 20일 충의사(忠毅祠)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매년 봄 추모제향을 거행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