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봄을 찾아서
상태바
붉은 봄을 찾아서
  • 유성희 큰사랑 요양병원 간호사
  • 승인 2019.04.04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성희 큰사랑 요양병원 간호사

“섬 전체가 붉디붉겠죠?”
평생 섬을 찾아 남편과 여행하자고 약속했었다. 올해 첫 번째 섬을 어디로 정할까? 섬을 찾는 순간부터 설렌다. 아직 춥지만 꽃 피는 섬에 가고 싶다고 마음이 합해졌다. 여기저기 찾다가 드디어 정했다. 남해 바다에 있는 섬이다. 동백꽃이 많아 동백섬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동백이란 말만 들어도 빠알간 꽃이 가슴에 피어난다. 푸른 바다를 가르고 배가 육지를 떠나 섬을 향해 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가 카메라를 메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무엇을 하며 살아온 사람일까? 홀로 여행을 하는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배안에서 방송으로 섬 소개를 했다. 한자로 마음 ‘심’ 자를 닮아서 ‘지심도’라 했다. 섬에 도착했다. 울창한 숲이 보였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붉은 동백꽃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동백꽃이 보이지 않는  동백섬이라니...적잖이 실망했다.

울창한 동백나무 숲 속에 오솔길이 길게 있었다. 나무 위를 보니 작지만 동백꽃들이 드문드문 피어있었다. 남편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따라 걸었다. 뒤에서 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 먼저 가라는 듯이 길옆으로 비껴주었다. 두 남녀는 손을 꼭 잡고 말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멀리 전망대를 목표로 가는 것일 것이다. 청춘도 아닌데 손을 꼭 잡고 열심히 가는 두 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발그스레했다.

남편은 저만치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뭔가 열심히 찍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부르면 금방이라도 달려올 수 있는 거리의 간격을 두고 걷고 있다. “당근 잎인 줄 알았는데 현호색이었어....노란 현호색. 현호색은 보랏빛인 줄 알았는데.....”식물에 관심이 많은 남편은 중얼중얼 말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현호색이 꽃 이름이에요?” 나는 물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노란 꽃은 현호색과의 ‘산괴불주머니’였다) 남편은 꽃과 이파리를 자세히 보았다.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했다.

젊어서 같으면 “빨리 가요....뭐를 그렇게 들여다봐요? ... 풀이네...별 것도 아닌 것을 ... 해가 지면 어떡해요?...집에 빨리 가야지.” 내 잔소리가 폭풍우 같이 쏟아졌을 것이다.

남편과 달리 난 잔잔한 푸른 바다가 마음에 들어왔다. 숲속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말을 건네 왔다. 나무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옆에 나무가 기대어 서 있었다. 아마도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쓰러지던 나무는 옆 나무에 기대어 겨우 살아났을 것이다. 수 십 년이 넘었을 나무들이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함께 서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의 나무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나무숲이 경이로웠다.

“지금 바람이 부니 향이 나지?” 어느새 남편이 곁에 와 말을 걸었다.
“글쎄...무슨 향이요?” 숲 속에 무슨 특별한 향이 있단 말인가? 긴 호흡으로 냄새를 들이마셨다. 푸른 숲의 향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코를 벌름거리며 그 숲의 향속에 특별한 냄새를 찾느라고 제자리에 서서 온 정신 쏟았다. 진짜 특별한 향기롭지 않은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인상을 쓰는 나를 보며 남편은 찾았냐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냄새가 좀 그렇지? 어릴 때 나무하러 가서 이 냄새를 맡으면 좋았지...개동백이라고 불렀는데 이 나뭇잎을 염소들이 아주 좋아했거든...그리고 동백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면  봄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좋았어"

앞을 보며 걷고 있어도 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웃고 있다는 것을 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이 나타난 표정을 그려가며 대화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난 속으로 다른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언젠가 그는 어릴 때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라면 죽어라 하기 싫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힘들게 땔감을 하러 다니던 남자아이 가슴에 일렁거리고 두근거렸던 봄 향기를 훔쳐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심도라는 섬 이름처럼 마음속 오솔길을 걸으며 우리는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어 봄바람에 날려 보냈다.

돌아오는 배를 타려고 여행객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동백꽃이 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