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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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2)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19.04.0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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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가다 (행궁 편)
배정옥 수필가

종각은 문헌을 토대로 고증하여 6칸,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로 발길을 돌리는 길에 행궁의 객사, 인화관의 역할을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정청에 전패를 봉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게 망궐례 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망월례 때 지방의 관리들은 며칠 전부터 미리 와서 기다렸다. 온 순서대로 더 가까이에서 국왕의 눈에 들기 위해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이다. 출세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국외 사신 및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의 유숙처로 중앙집권을 위하여 전국 읍치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이어 행궁 정문은 정조22년 (1798년)에 광주 유수 홍억에 의해 건립된 누문이다. 외삼문의 4개의 기둥에 주련들이 행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삼문안을 깊숙이 들어서니 외행전의 주련, 시구들이 일행들의 마음에 봄볕처럼 파고든다. [남한지]에 ‘하궐전 마루의 앞 기둥에는 세쌍의 시를 걸었으니 다음과 같다.’하여 주련의 시구가 적혀있다.

盛大가 처음으로 三代의 風俗으로 돌아와
大闕 숲에 오래 머무니 萬年의 봄이로다.
봄은 성인의 작은 마음속에 있고
백성은 모두 큰 화합 가운데 기운이 있도다
만민이 노래하고 춤추는 태평한 세상의 평화로운 풍경이요
천리에 뻗친 산과 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좋은 땅에 봄이 온 것 같구나

싯구의 의미를 되새기고 읆조리며 임금님의 침전 내행전, 일장각, 재덕당을 꼼꼼히 살펴보고 후원에 있는 정자 이위정으로 향했다.

이위정은 순조 17년(1817년)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이위정에 관련된 기록은 ‘이위정기가 탁폰과 함께 [중정남한지]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기문은 심상규가 짓고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때 심상규의 나이가 51세였고 김정희의 나이는 31세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석학으로도 알려진 조선의 선비 중 선비인 추사, 세한도의 소나무는 추운 겨울이 와야 푸르름이 돋보이는 것, 군자는 세상이 어려울수록 군자의 절개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추사 선생은 주석으로 달았다. 유리안치의 제주도 귀양살이를 그려보며, 좌전과 우실로 향했다. 왠지 종묘 앞에 서니 고개가 숙연해진다.

종묘인 좌전은 유사시 종묘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기위해 만든 곳이다.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의 보장처로서 기능이 입증되자, 숙종37년(1711년)에 부윤 김치륭이 우실과 함께 건립하였다. 좌전이라는 명칭은 건립 당시 별궁, 별전 등이 논의 되었었다. 결국 봉안처가 행궁의 좌측에 위치하므로 좌를 붙이되 예의 의미를 지닌 묘를 감추고 전을 붙여 사용하게 되었다. 서울의 종묘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우실은 왕실의 사직을 모시는 곳으로 숙종 37년(1711년) 좌전과 함께 건립되었다. 기록에는 원래 단만 있던 것을 4칸 건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사직단을 ‘우실’이라 이름한 것은 중국 주대 이후 도성배치법에 있어서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왕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앞에는 조정, 뒤에는 저자거리를 배치하는 예이다.

오전의 코스인 행궁 역사를 서둘러 마치고 나니 12시가 넘어있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인지 일행들은 다들 배고픈 기색이 역력했다. 중식으로 그 유명한 ‘양반해장국’ 효종갱을 먹기 위해 김교수님께서 미리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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