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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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더께가 더해가도 지워지지 않는 향기(3)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19.04.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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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문화재 지수당(地水堂)
배정옥 수필가

효종갱은 1800년대에 등장한 지금의 해장국이다. 효종갱(曉새벽효,鐘쇠북종, 羹국갱)은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 이라는 뜻으로 한양(서울) 양반들이 먹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음식이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내 갱촌 국 동네에서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와 표고버섯, 쇠갈비, 해삼, 전복을 토장에 섞어 하루종일 끓여서 밤에 솜으로 싸서 (소달구지에 실어) 한양으로 보내면 새벽종이 울릴 때 쯤 재상들은 따뜻한 해장국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양반해장국’ 이라고도 불렸던 효종갱은 영양가도 높고 소화가 잘 되어 숙취 해소와 보양식으로 인기가 높았던 조선시대 최고급 해장국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밀려 왔지만, 오후 코스인 남한산성 및 문화재의 지수당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코스 일정은 문화제 중 하나인 지수당에서 시작되었다.

지수당은 현종 13년 [1672]년에 지어진 정자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3개의 연못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없어진 3번째 연못은 밭으로 바뀌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지수당 옆 연못가에 크지 않은 묘비가 서 있다.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 적혀있다. 원래 광주시 병풍산에 있던 비석을 이 자리로 옮겨 온 것이다. 조선조 정이품에 해당하는 동지중추부사 서흔남의 묘비다.

서흔남(徐欣男). 그는 원래 성도 이름도 없이 남한산성에서 대장장이와 허드렛일로 살아가는 천민이었다. 이름 없는 한 민초가 정승 반열에 오르는 그 기막힌 설화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서울을 벗어나 어스름 새벽길에 남한산성으로 오르고 있었다. 멀고 가파른 길에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었다. 임금이 탄 말이 눈길에 미끄러져 말이 엎어졌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였고, 신하들은 번갈아 가며 업고 올라갔다. 허나 이 일을 어찌하랴, 곧 신하들마저도 지치고 하나 둘 흩어지게 되었다. 동지섣달 추운 겨울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대장장이라는 서흔남이 있었다. 신하들의 대충 사연을 들은 서흔남은 인조를 등에 업고 쏜살같이 성안으로 올랐다. 그는 청나라 군사를 따돌리기 위하여 짚신도 거꾸로 신고 있었다. 그리고 인조는 고마운 마음에 서흔남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다. 서흔남은 바로 앞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곤룡포를 달라고 하였다. 인조는 신하에게 시켜 곤룡포 한 벌을 하사한다. 서흔남은 매일 곤룡포에 절을 하며 죽을 때에는 같이 묻어 달라고 할 정도로 고이 간직하였다. 그리고 임금 인조는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다. 사대부 정치인들은 화친이냐 결사항전이냐로 줄기차게 입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임금의 모병 격문을 전달할 연락병 하나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임금은 얼마나 좌절했을까. 오죽 절망했으면 경들을 죽이면 혼백이 날아가 격서를 전할까 했을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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