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당에 노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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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당에 노닐다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05.0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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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문화재청에서 조선시대 옥천 건축물 중에서 이지당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고 다른 한옥에 비해 양 측면에 각각 멋진 누각을 두는 등 특이성이 있어 올해 국가 보물 지정을 위한 예비 타당성 검토 대상에 올랐다.

이지당은 조선시대 중기까지 인근 마을 학동들이 다니던 각신서당이었다. 중봉 조헌 선생과 송시열 선생이 강학한 각신서당으로 옥천읍 옥각리 마을의 금, 이, 안, 조씨 문중에서 1901년(광무 5)에 재건축한 서당이다.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위치한 이지당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1칸, 좌우에 각각 2층 누각 구조로 되어 있어 풍류적 운치가 더했다. 이지당 절벽 아래로 서화천이 흘러 풍광이 수려하고 서당과 누각이 함께 있어 유림들이 강학과 시회를 열기에 좋은 풍류지였다.

그리고 동쪽 오리쯤에 조선시대 500년 동안 군청관아가 있던 옥천 구읍이 가까워 선비나 벼슬아치 등 묵객들이 자주 찾던 장소다. 예전에는 옥천 읍내 초·중·고 학생들의 즐겨 찾던 소풍 장소이며 그 아래로 펼쳐진 서화천 백사장은 추억이 담긴 옥천의 명소였다.

이지당은 옥천 출신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학문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다“는 그칠지(止) 두개를 시전의 글귀에서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 하였다.

일찍이 임진왜란 전에 중봉 조헌 선생께서 장령산 금천계곡부터 이곳을 흐르는 서화천과 부소담악, 금강 합수머리 용호리까지 아홉 곳의 빼어난 절경을 ≪율원9곡≫ 시로 노래했다. 그 율원9곡의 세 번째 시 배경지가 이지당이며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임정(林亭)」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다음 시는 제자 이종철과 냇가를 산보하는데 김대승과 주현중이 술을 들고 찾아왔을 때 지은 시이다.

물 곱고 산 밝은 땅,
바람 높고 잎 떨어지는 가을
배회하는 조(헌) 제독,
주광문을 해후 했네.
다행히 신선들 모인 때에,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한가로이 모두 다 한껏 취하고서,
달빛타고 긴 모래톱 걷는다네.
-조헌과 노닐다 유상지소

이지당 입구 오솔길 위편의 큰 바위 암벽에 음각된 글씨로 중봉 조헌 선생이 이곳 이지당 즉 당시 각신서당에 오셔서 그 아래 서화천 모래밭과 오솔길을 거닐며 선비들과 대화와 사색을 하던 곳이라 유상지소라 부른다.

1900년 초 송병선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해 삼남지방 순회강연을 이지당에서 처음 시작한 곳이다. 을사늑약 때 고종을 알현하고 대전 소제동에서 전국 제자들에게 통분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고 이를 계기로 1907년 정미의병 때 유림 1,000여 명이 항일의병에 동참한다.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하니,
스승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하늘 거리에 기성·미성이 멀고,
인간 세상에는 세성이 돌아 왔구려.
사업은 주자의 글 속이,
연원은 율곡에게 놀았노라.
맑은 술잔 올리고자,
마름 물가에 캐었노라.

그리고 위의 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지당에서 숙종 때 옥천군수를 지냈던 김만균(金萬均)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주자학과 성리학에서 높은 학문을 가진 중봉 조헌 선생을 그리워하며 율곡 이이 선생의 문인임을 나타냈고 그에 대한 공경심을 표현했다. 현재 이지당은 역사적 가치로 충북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앞으로 국가 보물로 승격될 가능성이 높다.

봄 소풍 명승지 이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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