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 하나로 25년간 옥천경제 이끈 ‘육종철’
상태바
‘성실’ 하나로 25년간 옥천경제 이끈 ‘육종철’
  • 임요준기자
  • 승인 2019.05.16 1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 농민 살린다며 농산물직판장 설립
1일 매출 1만5천원, 폐업 직전 대표 맡아
농민·주민·지역 업체 간 상생길 찾기에 온힘
지역경제 살리기 산단조성은 구시대적 발상
특색 있는 교육·건강·운동산

품질 좋고 저렴한 상품을 옥천 주민에게 제공하는 것을 최고 보람으로 여기며 지난 25년 세월을 한결 같이 달려온 옥천농업진흥(주) 농산물직판장(옥천읍 금구천길 5) 육종철(60) 대표.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지만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중학교 때부터 형들의 몫까지 농삿일을 해야만 했던 육 대표는 흔히 말하는 ‘키가 크면 약골’이라는 편견을 어김없이 깨트린다. 훨친한 키에, 얼굴엔 ‘성실’ 두 글자가 씌여진 듯 평생 성실 하나로 60 인생을 살아온 그의 삶의 이야기와 옥천경제의 현실을 들었다.

△어린 시절과 가족관계  
육 대표는 옥천읍 대천리 전형적 농가에서 태어났다. 내성적 성격에 정 많은 어린 종철은 식량이 부족한 시절임에도 동냥 거지에게 몰래 쌀을 가져다주곤 했다. 지금의 키 큰 육 대표와 달리 어린 종철은 체구가 작았다. 중2학년 때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외지에 나간 형들을 대신해 농삿일을 도맡아했다. 순발력과 강한 체력으로 씨름선수가 된 고교생 종철은 몸무게 59kg에 불과했지만 도민체전에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을 걸었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공고에서 선반을 전공했다. 장인지(57) 여사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성실, 그 이름 육종철
병든 아버지와 외지에 나간 형들을 대신에 일명 ‘똥장군’이 된 고교생 종철은 학업과 고된 농삿일에다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양수리 뚝방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라도 알아야지...동네에선 그를 찾느라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정신을 차리고 겨우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온몸에 가려움증과 함께 최후의 생리적 발악이라는 생똥을 누고 만다. 그의 중고교 시절은 일뿐이었다. 그럼에도 학교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고3때 서울시 소재 알아주는 기업체에서 5명을 선발하는데 190명 중 40명이 응모해 선발됐다. ‘성실’하면 ‘종철’이라는 담임선생님의 적극적 추천이 뒷받침 됐던 것이다. 육군 탱크부대에서 군복무를 한 그는 한 번 선정되기도 힘들다던 모병사병에 3번씩이나 선정됐다. 그에게 성실은 가정, 학교, 군대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전역 후 고향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벼농사와 소 사육은 기본, 땅두릅나무, 포도, 울타리콩, 감자, 딸기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한전에 검침원으로 취업, 20년간 근무했다. 농사는 천직. 한전에 근무하면서도 농삿일은 계속됐다.

△부당이득 5만 원 갚으러 제주도까지
한전에 근무할 때다. 군북면 유지택 씨가 전기를 용도 외로 사용함을 알고 직원에게 알렸다. 조사에 나선 직원이 현장에 다녀오더니 5만 원을 쥐어줘 엉겁결에 받았다. 좋은 일에 쓰자며 군서면 월전리 다리골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불우 이웃에게 라면과 생활용품을 챙겨 드렸다. 하지만 퇴직 후에도 개운치 않은 생각에 유씨를 찾아 나섰지만 제주도로 이사 가고 없었다. 수소문 끝에 유씨를 찾아 4배에 해당하는 20만 원을 갚고서야 육 대표는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양심적 삶이 오롯이 드러난 대목이다.

△폐업 직전 농산물직판장 대표 되다
1991년 옥천군은 농민소득향상을 위해 농산물직판장을 건축했다. 하지만 이를 맡아 운영하겠다는 업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엔 벽돌공장이, 그런데다 유동인구도 많지 않은 위치여서 주민들의 외면은 예견된 일이었다. 전국 최초 위탁영농을 목적으로 설립된 옥천농업진흥(주)에 제안이 들어왔다. 군의 권유로 영업을 시작했지만 1일 매출은 1만5000원에 불과해 운영 2년 만에 폐업 위기에 놓였다. 이때부터 육 대표는 직판장 운영을 맡게 된다. 폐업만은 막자며 당시 서강돈 군수의 제안에 따라 정육과 생활용품도 취급하게 돼 지금의 마트형태를 갖추게 된다. 당시 지역 내 중대형마트 1일 매출액이 1500만~3000만 원 가량. 이곳 직판장은 겨우 10만 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육 대표는 “금액으로 치면 300대 1의 경쟁이다. 그럼에도 엎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나름 긍지이고 보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1997년 본격적인 학교급식이 시작되면서 대전의 중도매업자들을 제치고 공급하게 돼 지역 자본의 외부 유출을 막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한 농민들과 직거래를 통해 소득향상에 도움을 준 것도 큰 보람으로 여겼다.

△지역과 상생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직판장은 인재육성을 위해 충북도립대에 2000만 원, 옥천군장학회에 300만 원 등 장학금을 기부했다. 복지관에 1000만 원 상당 농산물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방울토마토의 경우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소비촉진으로 가격상승을 이끌기 위해 하루 200박스씩 1만3000박스를 구입해 복지관에 후원하기도 했다. 농민을 위하고 복지관 이용자들을 위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 육 대표의 상생경영의 사례다.

△미래 옥천 경제
육 대표는 단순 산단 조성으로 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인구를 늘리는 정책은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시대 흐름에 맞게 인구정책도, 지역경제 살리기 정책도 변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옥천만의 특색을 살려 교육과 건강, 운동을 하나로 잇는 사업을 통해 인구유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실생활 영어체험관 건립으로 글로벌 인재육성과 외식산업 활성화를 위한 음식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고 했다. 충북산과고에 조리학과를, 충북도립대에 식품영양학과 신설을 통해 고교와 대학의 수업이 연계되고, 외식산업을 관광산업으로 연계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끝으로 육 대표는 “그동안 직판장을 운영하면서 사적 일반마트가 아닌 공익적 사고로 열심히 운영해 왔음에도 최근 군과 마찰이 일어 집회까지 열어 걱정을 끼친데에 죄송한 마음”이라며 “마지막까지 군과 잘 협의해 마무리 하겠다”고 심경을 토했다.
성실 하나로 폐업 위기에 놓인 농산물직판장을 일으키고 주민과 농민, 지역 업체가 함께 사는 상생경영을 펼친 육종철 대표. 옥천경제와 함께해 온 지난 25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흐른다며 잠시 회심에 잠겼다가도 미래 옥천경제를 위해 다시 일어서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빛이 강한 의지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