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39)-김제갑(金悌甲)③
진주대첩의 영웅, 조카 김시민 장군 괴산 구안동 김씨 명문가 출신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로 진주대첩을 이끈 민족의 영웅이다. 김시민 장군은 옥천군수를 역임한 김제갑 충신의 조카다. 김 군수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1591년 원주목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강원도 원주 영원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김제갑(金悌甲) 목사다. 또 그의 아들 도승지 김시헌과는 4촌지간이다.
김시민의 동생 김시약(金時若) 부사는 진주성 싸움에서 형을 도와 용감히 싸웠다. 그리고 고향 괴산에서 군수 이봉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는 등 이후 전공이 뛰어났다. 그 공훈으로 판관 등을 거쳐 평안도 창성부사를 지내는 중에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 청군에 대항하다 붇잡혔으나 굴복치않아 죽임을 당했다. 그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다.
김시민(金時敏)은 1554년 9월 23일에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인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에서 태어났다. 원래 김시민 장군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며 오랫동안 세거한 아버지 고향은 김시민 장군의 묘소가 있는 충북 괴산군 능촌리이다.
본관은 (구)안동 김씨(安東金氏)이며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지평을 지낸 증좌찬성 아버지 김충갑(金忠甲)과 어머니 증정경부인 창평 이씨 사이에 셋째 아들이다. 부인은 부여 서씨이고 손자 김득신은 괴산(現 증평) 출신으로 노력하는 사람의 표본이다. 그는 59세에 대과 급제, 중추부사 안풍군에 올랐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열전 부분 등을 1만3천 번 읽은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김시민은 1578년(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 군기시에 입사하였다. 훈련원 판관에 재직 때 병조 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했다. 당시 정승 이헌국이 그의 능력이 뛰어남에 조정에 청해 군기시 판관에 유임시켰다.
여진족 니탕개 토벌, 임진왜란 발발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두민강 연안 함경도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로 돌아와 피난하였던 주민을 귀향케 하고, 성채를 보수 및 군사 훈련으로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 고성과 창원을 수복했다. 이어 김면 의병장에게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금산서 남진하는 왜군과 싸워 거창에서 승전, 1592년 진주목사로 승진했다. 취임 후 염초 5백여 근과 총통 70여 개를 만들에 부대를 숙달시켜 진주성 방책을 강화했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의주 행재소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고 그 뒤 김산(金山=김천)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임진왜란 진주대첩 영웅 순국
한 번 대패한 왜군은 진주성을 빼앗으려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 2만 명이 진주성으로 공격했는데, 1부대는 마재를, 2부대는 불천을 넘어 들어오고, 3부대는 진양을 무찌르고 들어왔다.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자, 백성들을 진주성으로 들어오게 한 후, 여자는 남장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조직된 3,800명의 군대로 7일 동안 혈전 끝에 왜군을 진주성에서 퇴각시키는 대첩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 마지막 날인 1592년 12월 26일 왜군의 탄환을 맞고 병상에 누워 있다 순국했다. 그는 향년 38세였다. 그의 묘소는 구안동 김씨(安東金氏) 세거지 고향 괴산 능촌리에 묻혔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에 추봉되었다.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고, 1702년(숙종 35년) 다시 영의정에 추증,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 진주 충민사에 배향되었다가 진주성 내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또 고향 괴산 충민사에 위패가 모셔져 매년 제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