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44)-정기풍(鄭基豊) 군수 ②
정기풍 목사 축출하려 투서, 서원 전패문제 이용하여 서인 일파 목사 모멸죄로 옥에 갇혀 심문받다 죽기도
정기풍 옥천군수는 효종 4년(1653년) 8월 1일 필선(弼善)을 제수받고 이임 후 사헌부 집의와 사간을 거쳐 외직으로 1654년 7월 전라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나주에는 경현서원이 존재했고 그 운영권이 전패(殿牌) 훼손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비서인계가 경현서원 원장이 되자 당시 나주목사 정기풍(鄭基豊)은 이를 옹호했다. 전패는 지방 객사에 패(牌)자를 새긴 나무 패로 왕을 상징한다. 당시 나주의 서인들은 이를 빌미로 목사 정기풍을 축출한 사건이다. 전패가 훼손되면 그 책임 일부가 목사에게 돌아가는 점을 이용한 사건이었다.
경현서원 전패 문제 서인 미움 사
이와 관련해서『효종실록 15권』 1655년(효종 6년) 12월 19일 자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이에 앞서 금성현(錦城縣)에 있는 경현서원에서 서원 유생들의 논의가 대립하여 서로 배격하였다. 전후 수령들이 각기 색목(色目)을 따라 시비를 논하여 풍습이 점차 나빠졌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일컬어졌다. 1645년(인조 23)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사건으로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격하되었고 후에 나주목으로 다시 환원시켰다.
마침 서원의 석전제를 지내게 되어 본주에서 진사 김종량을 헌관으로 차임하니 유생 김유도 등이 말하기를 “김종량은 바로 혼조(광해군) 때 서얼인 김우성의 조카이다. 김우성이 일찍이 상소하여 모후를 폐위시키기를 청하였으니 그 조카로써 헌관을 삼을 수 없다”하고 드디어 축출하였다.
투서로 정목사 모욕한 일파 형벌받음
목사 정기풍(鄭基豊)이 향교의 유생들로 하여금 김유도 등에게 벌을 내리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과거 시험장에서 익명으로 투서하여 목사를 모욕하기를 낭자하게 하였다.
기풍이 “이것은 필시 김유도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하여 즉시 심문하여 다스리고 다시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감사가 보고하니 상이 분당(分黨)의 풍조를 몹시 미워하여 김유도, 염진거, 김종량 및 김종량의 무리인 박홍훈을 서울의 옥에 잡아들여 수령을 함부로 모멸하고 헌관을 멋대로 내쫓은 죄를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박홍훈이 먼저 곤장을 맞고 쓰러져 죽었는데 ~<중략>~
형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죄인 가운데는 누차에 걸쳐서 형을 받아도 죽지 않은 자가 있기도 합니다. 지금 홍훈은 또한 준례에 따라 형을 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재차의 신문으로 갑자기 쓰러져 죽었으니 신들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홍훈이 나이가 50이 넘은 데다 오랫동안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 이로 인해서 죽음을 초래했다면 형세 상 혹 그럴 수 있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국가의 정치 중에 형옥(刑獄)이 가장 중요하다”
형 정기광, 승지·형조참의 역임
정기풍 옥천군수의 형 정기광(鄭基廣)은 1579년(선조 12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거(子居)이고 호는 추제(追齊), 토곡(土谷)이다. 조린의 딸과 유영달의 딸에게 장가갔다.
1608년(광해군 1년) 별시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여 1611년(광해군 3년)에 내직인 승정원 정7품 주서(注書)를 거쳐 1613년에 예조좌랑과 병조좌랑를 지냈다. 1618년에 평안도를 감찰하는 평안도도사를 역임하였다.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인조반정 후 나주목사와 동래부사를 지냈고 내직으로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는 좌부승지와 우승지를 지냈다. 이후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