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46)-정동망(鄭東望) 군수

구미 출신, 옥천군수 수령 재임 때 선정 베풀어 문경새재 도둑떼 효유하고 도와준 훌륭한 목민관

2026-04-02     전순표 시인, 국사편찬위원회 충북 부회장(사료조사위원)

 

정동망 군수 6대조상 정붕 부사 묘

 

정동망(鄭東望) 군수는 조선 중후기 무과에 합격하여 공주영장과 옥천군수를 지냈고 벼슬을 내려 해미현감을 역임한 후에 충청병사를 지낸 조선 중기 무신이며 훌륭한 목민관이다. 

그는 효종 3년(1652년)에 경상도 선산군 무을면 웅곡인 지금의 구미시에서 출생하여 1700년(숙종 26년)에 생을 마쳤다. 그 당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 중기 40여 년 동안 이어진 전쟁과 반역의 영향으로 나라가 편치 못해서 스스로 무(武)를 택해서 무술을 열심히 연마하여 무과에 합격했다.


도적떼 평정, 도적 생업 도와줘

그는 무관으로 관직에 있을 때 많은 도적 떼가 문경새재 조령에 웅거하며 백성을 괴롭히자 도둑 떼를 평정하기 위해 나섰다. 도둑 떼 잡는 일을 전담하던 충청도 공주 진영(鎭營)의 토포사로 파견되어 도둑들을 진압 평정하고 효유하여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생업을 도와주었다. 


숙천부사 때 백성구휼, 훌륭한 목민관

후에 평안도 숙천부사에 부임해서는 가뭄과 한해 등으로 흉년이 든 숙천(肅川) 지방 백성의 먹을 식량을 구휼 하였고 이어 무인직인 전라도 수영을 총괄 지휘하는 전라수사(全羅水使)에 제수되었다.


옥천군수 말고삐 놓아 주지 않아

1697년(숙종 23년)에 옥천군수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옥천고을을 잘 다스리자 이임하여 가는 길에 백성들이 정동망 군수의 말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속리산에 입산하여 학문에 전념하려고 하였으나 벼슬이 낮은 충청도 해미현감(海美縣監)에 제수되었다. 그곳에 마침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여 곤란함을 겪을 때 관아의 식량을 아껴서 백성들의 배고픔과 기아를 구제하였다. 


해미현감, 세금징수 ‘최하위’ 파직

그러나 정 군수가 해미현감 재직시절에 굶주린 백성의 배고품과 기아를 구제하느라 세금을 징수 못해 조정에서 상소를 올려 파직당했다. 

조선왕조 『비변사등록』 숙종 26년(1700년) 4월 13일 기록에 아뢰기를 “모든 도(道)의 환자(관리)에 있어 걱정되게 세금징수를 하지 못하여 최하위로 판정이 된 수령을 조사하여 계문하라고 일찍이 결정하여 분부한 바 있습니다. 여러 도(道)의 계문이 도착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일시에 논죄해야 하나 그 가운데 충청도의 해미현감 정동망(鄭東望)은 이미 최하위로 계문되었습니다. ~<중략>~ 지금 이 정동망도 다른 수령과 같이 장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전례에 의하여 우선 파직하여 피차 직임의 방해가 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께서)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현감 파직후 바로 충청우병사 승진

조정에서 훌륭한 목민관임을 알기에 바로 그해 1700년(숙종 26년) 3월 6일 충청우병사(忠淸兵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곧 병이 나서 1700년(숙종 26년) 8월 27일 생을 마쳤다.

정동망 병사가 병환으로 숨지자 숙종은 예조에 명하여 장례 예물과 제문을 예조좌랑 예관과 함께 내려보내 장례를 치러주었다. 정동망 충청병사는 임종에 이르러 “보검에 녹이 슬고 준마가 헛되이 늙는다”고 한탄하였다 한다. 그의 선영은 지금 구미시인 선산군 무을면이다. 공주의 토적들은 평소 자신들에게 선정으로 돌봐준 보답으로 3년간 그의 여막을 지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