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48)-한충순(韓忠順) 군수
조선 전기 옥천군수, 첨정, 동례원 상례, 군기시정 역임한 문신 사헌부, 의정부서 부적합 요청, 조선 전기 역량이 부족한 군수
조선 초기인 1446년(세종 28년)에 태어나 옥천군수와 판사를 지낸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도정공(都正公)파 시조이다.
1492년(성종 23년) 6월 한충순(韓忠順)은 옥천 군수(沃川郡守)와 강화유수에 부적합하다는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 임명이 취소되어 첨정에 머물렀다. 그 후 37개월 만인 성종 25년(1494년) 6월에 주상의 전교로 통례원 종3품 상례(相禮)로 승진하였다. 연산군 1년(1494년)에 군기시의 실무책임자인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 직책을 맡았다. 군기시는 조선 시대 병기 등 군수품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로 지금의 방위사업청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헌부 강화부사 부적합 지적
이에 대해 『성종실록 266권』 성종 23년(1492년) 6월 18일 자 기록에 “사헌부 지평(持平) 민이(閔頤)가 와서 아뢰기를 「강화 부사(江華府使) 한충순(韓忠順)은 본래 재간이 없는 데다가 경력도 얕으니 큰 고을인 강화를 어떻게 감당해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앞서 옥천 군수(沃川郡守)가 되었을 적에 근무평점 고과가 중(中)으로서 첨정(僉正)으로 옮겼었는데 1년이 못 되어 곧 부사로 승진하였으니 인품과 기량이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만(箇滿)이 되어야 승진시켜 서용(敍用)하는 법에도 해가 됩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윗글에서 ‘고과(考課)’란 용어는 벼슬자리를 옮기는 관리들이 6개월마다 근무 평정을 받는데 그때 근무 성적을 고과 점수를 말한다.
의정부도 강화부사 부적합, 임명 취소
또 다음날 『성종실록 266권』, 성종 23년(1492년) 6월 19일 자 기사에서 「이형손과 한충순이 각기 변장과 강화 부사에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개정하다」란 기록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중략>~ “한충순(韓忠順)은 앞서 옥천 군수(沃川郡守)로 있다가 개만(箇滿)이 되어 체임되면서 고가 점수가 중(中)으로서 첨정으로 옮긴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지금 강화부사로 제수했으니 인품과 기량이 적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승진하여 옮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라고 한충순 강화부사 임명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해 (주상이) 그렇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37개월 만에 종3품 통례원 상례 승진
『성종실록 291권』 성종 25년(1494년) 6월 12일 자 기사에서 「이조에서 한충순을 의망하여 아뢰다」 기록에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비록 현능(賢能)이 아니더라도 또한 근만(勤慢)을 상고하여서 벼슬을 올리는 승서를 하기 때문에 이 앞서도 첨정으로 부정(副正)이 된 자가 많았습니다. 한충순은 첨정이 된 지 37개월이나 되었으므로 의망하여 아뢰었습니다.” 하니, (주상이) 전교하기를, “한충순(韓忠順)은 첨정이 된 지가 오래되었고 첨정으로 3품을 삼은 전례가 있다. 한충순은 별다른 허물이 없으니 상례(相禮)로 삼은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상례는 국가 의례를 관장하던 통례원의 종3품 관직이다.
『연산군 일기 7권』 연산 1년(1495년) 7월 5일 기사에서 「“대간이 한충순의 경망과 한종이 신병으로 출사하지 않음을 들어 개차할 것을 아뢰다”」 기록에 대간이 아뢰기를 “영접 도감 낭청(迎接 都監郞廳), 통사(通事) 등의 상과 직첩(임명장)을 사신이 돌아간 뒤에 도로 거두신다는 명령은 이미 들었거니와 그중에 군기시정 한충순(韓忠順)은 본시 경망하고 조급하며 돈령부정 한종(韓悰)은 신병으로 출사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이니 아울러 개차하소서.” 하니, 명하여 원상(院相)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다.
한중순 옥천군수가 살았던 15세기 전반은 세종대왕과 성종 시대로 국가의 기초를 단단히 닦던 시기로 국방도 튼튼히 하고 한글도 창제한 국운 융성기였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을 밀어낸 계유정란이 있었으나 이후 예종을 이은 성종은 풍류를 즐기고 예술적인 기질이 다분했던 인물로 성종 시절을 조선 초기 르네르상스 시절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