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50)-이유돈(李裕敦) 군수
홍천현감, 50세에 옥천군수, 강서현령, 옥과현감 역임 묵은 곡식 축나는 것 당연지사, 옥천군수 비방 어쩐 일
이유돈 옥천군수는 1824년(순조 24년)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59세인 1882년 (고종 19년)에 지금의 포천시인 영평(永平) 현령 재임 중에 생을 마친 조선 말엽에 외직을 주로 밑은 문신이다.
그는 조선 말엽 50세가 되던 해인 1874년(고종 11년) 7월에 옥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 군수의 본관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며 자는 경려(景呂)이다.
아버지 이계영(李啓榮)은 정3품 통훈대부 당하관을 지냈고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尹氏) 윤치일(尹致日)의 딸이다. 위로 형 이유석과 아래로 동생 이유광이 있다. 그는 38세인 1861년(철종 1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음직 관직진출, 주로 외직 맡아
그는 음관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1872년 1월에 강원도 홍천현감(洪川縣監)을 지냈고 1874년(고종 11년) 7월 12일에 옥천군수에 부임하여 1년 3개월을 역임하고 1875년 10월 19일 평안도 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이임하였다. 그 후에 1880년(고종 17년) 12월에 경기도 영평현령(永平縣令)에 부임하여 포천 지역을 다스리다가 재임 중 생을 마쳤다.
현령 홍정유, 군수 이유돈 맞교환
『승정원일기』 1875년(고종 12년) 10월 21일 자에 민창식이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의정부의 신칙을 인하여 말미를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는 수령들을 본조에서 재촉하였더니 강서현령 홍정유(洪鼎裕)는 신병이 매우 중하여 내려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의 신병이 이미 이와 같다면 억지로 부임하게 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니 파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유돈(李裕敦)과 서로 바꾸라.” 하였다. ~<중략>~
옥천군수 비방은 무슨 일
『승정원일기』 1878년(고종 15년) 3월 12일 자에 희정당에서 충청좌도 암행어사를 소견할 때 좌부승지 한장석 등이 입시하여 수령들의 현부(賢否)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옥천 군수(沃川郡守)에게 근거 없는 비방을 한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겨울철 묵은 곡식 축냄은 당연
이승고가 아뢰기를 “작년에 사환(社還, 환곡)을 진휼할 밑천으로 옮겨 쓸 때에 겨울철에 묵었던 곡식이라 축난 것이 많았는데 못된 토호들이 축난 것을 이용해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내 ‘사창의 우두머리가 농간을 부렸다’고 하면서 비방을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특별히 더 자세히 조사해 봤더니 본말이 이러했습니다.” 하자, 상(왕)이 이르기를 “겨울철에 묵었던 곡식은 축나는 것이 당연하니 이 어찌 수령의 죄 이겠는가.”하니, 이승고가 아뢰기를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전 (옥천)군수 이유돈(李裕敦)은 가하(加下: 정한 액수 이상으로 돈을 더 씀)한 것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하니, 이승고가 아뢰기를 “단지 용도(用度)에 절제가 없어서 이렇게 가하(加下)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전 (옥천)군수 조준구(趙駿九)는 다른 고을에서는 잘 다스렸는데 여기서 그르쳤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하니, 이승고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 보은 군수(報恩郡守) 홍우경(洪祐慶)이 ‘발포(拔逋)했다’느니 ‘시포(始逋)했다’느니 한 일은 무슨 말인가?” 하니, 이승고가 아뢰기를 “아전, 관노, 사령(使令)들이 포탈한 것을 받아낼 길이 없어 환곡을 내주어 돈으로 만들어 포탈한 수를 납입하게 한 것이 150석이나 되었습니다.” 하자, 상(왕)이 이르기를 “엄하게 감독하지 못하고 순하게만 했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게 된 것이다.” 하니, 이승고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