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51)-김영벽(金映璧)
문과급제 이어 중시까지 급제, 학문·경학 출중한 학구파 옥천군수 김영벽 등 학문 심오 스승될만, 외손자 북방 평정
김영벽(金映璧) 옥천군수는 성균관 직강, 옥천군수 등을 지낸 조선 초기 세조 때 문신이다.
문종 즉위년(1450년) 3월 7일 자, 『문종실록 1권』에 「성균(관) 생원 원효경 등이 불사의 폐단을 상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다」 기사에서 ~<중략>~ 생원 김영벽(金映璧)이 아뢰기를, “황효원의 일은 신 등이 그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반드시 극력으로 간(諫)함으로써 죄를 얻은 것이라 인정되니, 신 등이 성총(聖聰)을 두 번이나 번거롭게 하는 것은 다만 전하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은 옳다. 그러나 충후(忠厚)의 뜻에서 발언한 것은 일이 마침내 폐단이 없겠지마는, 경박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대신의 계책이 어찌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그는 단종 1년(1453년) 식년시에서 정과 18위로 대과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세조 3년(1457년) 중시(重試) 정과 7위로 합격하였다. 세조 1년(1455년) 12월에 학유(學諭)를 제수받았고 1464년(세조 10년)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어서 성리학(性理)의 학설(學說)을 강론한 학자였다.
경학 뛰어나고 학문 출중 인정받아
1466년 옥천군수를 재직 중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학술이 특출나고 심오하여 학도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인정받고 있었다. 이에 대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7월 7 일자 「공조 판서 구종직이 흥학조건을 올리다」 기사에서 공조 판서 구종직이 학문을 일으키는 조건을 올렸는데 그 조건은 이러하였다.
“공자의 말씀에 ‘그대의 아는 사람만 천거하라.’고 했으니 전 사성 신(臣) 주백손, 전 사예 신(臣) 임수겸, 전 성균관 직강 신(臣) 이극증, 검상(檢詳) 신(臣) 이극기, 경력 신(臣) 구치동, (옥천)군수 신(臣) 김영벽(金映壁), 현감 신(臣) 김석통, 신(臣) 방강 등 8인은 학술이 정밀하고 심오하므로 모두가 남의 스승이 될 만합니다. 그들의 관작 차례에 따라서 성균관이든지 종학(宗學)이든지 사학의 책임을 맡긴다면 학도들이 반드시 모두 자제가 되기를 즐겨하고 부형이 자제를 소속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도 마땅히 또한 많을 것이니, 이것도 또한 학문을 일으키는 한 부분입니다.”
군수 때 선박비 대납건으로 파직
세조 12년(1466년) 10월 『세조실록』에 “경기 하진참(下津站, 역참)에 소속된 옥천군에서 바치는 강자선 1척을 현욱(玄旭)이 사사로이 대납했고 옥천군수 김영벽(金暎璧)도 또한 값을 거두어서 주었으니, 모두 범법한 부당한 일로 세조 12년(1466년) 11월 10일 자로 파직되었다.
외손자 우맹선, 북방 서북면 평정
옥천군수를 역임한 김영벽 군수의 외손자 우맹선(禹孟善)은 1475년(성종 6년)에 출생하여 1551년(명종 6년)까지 산 조선 전기 무신이다. 그는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평안도순찰사 등 중요한 북방 군사 관련 직책을 수행하였고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다.
본관은 단양 우씨(丹陽禹氏)이며 아버지는 현령 우종손, 어머니는 옥천군수 김영벽의 딸이다.
1501년(연산군 7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으로 등용되었다. 중종 초기에 함경도 온성판관이 되었고, 그 후 군자감 판관, 지금의 경남 합천군 동부 지역에 위치한 초계군수, 함경도 부령부사를 역임한 뒤 한때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시 도총부 경력으로 복직하고,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종2품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이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곧 평안도순찰사를 거쳐 병조판서로 임용되었으나 참판을 거치지 아니하고 특진되었다는 대간의 상소로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그 뒤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이때 서북면 북방의 국경지대가 시끄러워지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그곳의 치안을 회복하고 돌아와 도총관, 지훈련원사를 역임, 뒤에 위사원종공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