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52) - 한선일(韓善一)

역모를 막은 공훈 조흥빈·옥천군수 한선일 승진 옥천 구읍 비석군에 남은 이름 한선일 군수불망비

2026-05-14     전순표 시인, 전)국사편찬위원회 충북 부회장(사료조사위원)


한선일(韓善一) 옥천군수는 조선 중기 인조 때 문신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그의 본관은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며 자는 극경(克敬)이고 1573년 (선조 6년)에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한중겸이며 동생은 진사 한덕일이다.

29세 때인 선조 34년(1601년) 식년시 3등 59위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참봉을 하다가 인조 4년(1626년) 사복시정에 제수되었다. 사복시(司僕寺)는 임금의 가마와 외양간과 목장을 관장하며 사복시정은 정3품 관직이었다. 한선일 사복시정은 인조 6년(1628년) 3월 13일 옥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역모 막은 한선일 옥천군수, 통정대부 승진

옥천군수 재임 중에 인조 때 삼남 지방과 경기지역을 망라하는 큰 규모의 역모 사건을 미리 막은 공훈으로 인조 9년(1631년) 4월 24일 회인현감 조홍빈과 한선일 전 옥천군수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승정원일기』인조 9년(1631년) 4월 23일 자 가사「역적에 대한 논상에 대해 대신에게 수의한 결과를 보고하는 이조의 계」에 의하면 이조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하니, ‘고변인은 조흥빈(趙興賓), 한설(韓渫)이지만 본도의 감사 정효성과 전 병사 이의배, 공주목사 홍진도와 옥천군수(沃川郡守) 한선일(韓善一)도 모두 시종 함께 일을 논의하여 흉적들을 잡은 공로가 있으니 마땅히 논상해야 합니다.


옥천사람 고변인, 조흥빈도 승진시켜

승복하여 처형된 죄인을 체포한 도사에 대해서는 전에도 논상한 예가 있으니 마땅히 규례대로 우러러 여쭈어야 할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흥빈은 당상관으로 올려 주고 감사, 병사 이하는 모두 (승진) 하라. 조흥빈(趙興賓)과 한설에게는 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한 집과 토지, 노비를 경중을 구분하여 마련해 제급하도록 하고, 도사의 상격은 추관(推官)을 논상할 때 거행하라.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1631년(인조 9년) 1월 옥천사람 조홍빈은 권대진 등 일당 16명의 충청, 영호남에 걸쳐 대규모 역적모의를 당국에 고변하여 일망타진하는 성과를 거둬 그 공으로 관직을 제수받았다.


옥천구읍 비석군에 한선일 청근명정비

한편 옥천읍 상계리 옥천구읍 전통체험관 옆 도로변에 조선시대 ‘옥천군수 비석군’에  ‘한선일 청근명정비(韓善一淸謹明政碑)가 있고 숭정 13년(1640년 12월)에 건립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옥천구읍 '한선일 옥천군수 불망비'


옥천군수에 이어서 인조 9년에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복시 내승과 인조 10년(1632년) 강원도 철원부사, 인조 16년(1638년) 충청도 한산군수를 각각 역임하였다. 인조 19년에 오위도총부의 정4품 호군(護軍)과 인조 21년(1643년) 충청도 지금의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 지역인 청풍군수 그리고 인조 22년(1644년) 왕과 왕비의 인척을 관리하던 돈녕부 정3품 도정(都正)에 임명되었다.


한선일, 최무 군수 분분하니 바꿔라

『인조실록 44권』 인조 21년 7월 14일 기사에 기록되길 「(사)간원이 청풍군수와 괴산군수 임명에 사정이 개입되었다고 체차하기를 청하다」라는 제목으로 “간원이 아뢰기를, ‘청풍군수에는 한선일(韓善一)을, 괴산군수에는 최무(崔茂)를 의차한다는 설이 자자하였는데 제목이 내린 뒤에 보니 과연 다 그 설과 부합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심하게 개인적인 사정이 자행되는 일은 없으니 모두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