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54)-이휘(李暉)
무과급제 평안도절제사 등 무관직 두루 거쳐 군비 국방 강화 공헌 노론으로 경종 초기 신임사화 때 당쟁 휘말려 탄핵으로 삭탈관직
이휘(李暉)는 1719년(숙종 45)년부터 1720년(숙종 46년)까지 재임한 옥천군수이다. 그는 1655년(효종 6년)에 태어나서 1723년(경종 3년)까지 살은 조선 후기 무신이다. 관직에 나가 해남현감, 옥천군수, 전라도수사, 정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본관은 용인 이씨(龍仁李氏)이며 자는 여욱(汝旭)이며 아버지는 이정준(李廷俊)이고 어머니는 부평이씨(富平李氏)로 참봉 이희재의 딸이다. 그는 일찍이 작은아버지 이세화(李世華)에게 수학하였다.
무과급제 선전관 관직진출
이휘 군수는 무과에 급제한 후 처음 관직에 선전관으로 발탁되었다. 인조 23년(1645) 11월 18일 자 『승정원일기』에 <신병이 있는 무신 겸 선전관 이휘 등이 삭시사에 참가 못했다는 병조의 계> 기사에 의하면 ‘병조가 아뢰기를, “선전관, 무신 겸 선전관, 훈련도감 장관 등의 초하루 궁술 시험인 삭시사(朔試射) 때, 무신 겸 선전관 이휘가 염질 병이 재발하여 와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본청의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 등이 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라는 내용으로 사유를 갖추어 첩보하였으므로 현록(懸錄)하여 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평안도절제사, 금군장, 방어사 등 국방요직
이어서 비변사 낭관, 숙종 19년인 1693년에 사재감 종4품 첨정을 거쳐 국방의 중요한 자리인 평안도절제사, 정3품 금군장, 방어사를 지냈다. 이어 지방 수령으로 전라도 해남현감으로 있다가 1696년(숙종 22년) 파직되었다가 1697년 다시 서용되었다. 1699년(숙종 25년) 덕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숙종 29년(1703년) 5월 20일『승정원일기 412책』기사에서 “병조판서 이유(李儒)와 방어사 이휘(李暉)가 입시하여 각진(各鎭)의 전선에 조총을 마련하는 문제와 서북지방 변민의 생활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03년 12월에 부호군을 제수받고 1704년(숙종 30년) 4월 통진부사에 이어 1704년 9월 전라도 좌수사를 제수받았고 1706년(숙종 32년) 5월 곡산부사에 부임하였다. 1708년 황해도 병사와 경상도, 함경도 3개 도의 병사(兵使) 등을 거쳐 어영청 중군의 부총관으로 있으면서 조선 후기 군비를 강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1712년(숙종 38년) 11월 함경도 회령부사, 1716년(숙종 42년) 부호군을 받고 1717년(숙종 43년) 10월 북병사(北兵使)를 제수받았다.
북병사 고령 교체요구, 이후 옥천군수
숙종 43년(1717년) 10월 7일자 『비변사등록』에 <도제조 김창집(金昌集)이 입시하여 북병사 이휘(李暉)를 바꾸는 것에 대해 논의함>이란 기록에 의하면 “이달 초6일 약방에서 임금이 침을 맞는 데에 입시하였을 때에 도제조 김창집(金昌集)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북병사 이휘(李暉)는 전에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있을 때에 어사(御史)의 서계(書啓) 중에 들었었는데 그때의 도신이 꽤 칭원(稱冤)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 근래에는 무변(武弁)이 혹자는 나이가 늙고 혹자는 늙은 부모가 있어 의망할 만한 사람이 극히 드물었기에 이휘를 첫째로 두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유신의 상소에서 종전의 일을 추론하고 심지어 ‘다른 병영도 많은데 하필이면 북로(北路)를 맡긴단 말입니까?’ 라고 말하고 있으니 사체(일의 형편이나 성격)로 보아 강력히 부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의 말이 그와 같으니 억지로 부임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개차(바꾸어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숙종 44년(1718년) 윤8월에 부총관, 12월에 옥천군수에 부임하여 이듬해까지 재직하였고 평안도 정주목사 등 맡아서 치적을 남겼다. 숙종 45년(1719년) 12월에 부호군, 1720년 2월 전라병사, 4월에는 부호군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파에 휘말려 노론에 속한 그는 1722년(경종 2년) 신임사화 때 간관으로부터 관리로 군정을 잘못했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