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수(55)-이봉 군수
임진왜란 때 공 세워 옥천군수 지낸 상주 함창 이봉 의병장 이봉 의병장 휘하 이축 선봉장도 정유재란 때 옥천군수 지내
이봉(李逢, 1526~1595) 군수는 임진왜란 때 청주에서 경상도 상주 부근 함창(현 함창읍)에 초빙돼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공훈으로 옥천군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상주의 함창 의병부대 선봉장은 후에 옥천군수를 역임한 이축(李軸) 군수다. 이봉 군수의 본관은 한양이씨(漢陽李氏)이며 자는 자운이다.
이봉 옥천군수는 조선 중기 당대 최고 문장가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떨쳤다. 그와 교류한 대표적 인사는 조선 중기 가사 문학의 금자탑을 이룬 「사미인곡」, 「관동별곡」 등을 짓고 임진왜란 중에 좌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鄭澈, 1536~1594년) 선생을 들 수 있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대감으로 불린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4년) 선생이 있다.
이밖에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이황 선생의 제자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중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인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 선생이 있다. 조선시대 중기 유명한 여류 시인 이옥봉(李玉峰) 시인은 그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한 후 함창 의병장에 추대되어 정경세 의병장 등과 경상도 함창, 상주 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상주, 함창, 문경은 소백산맥 험준한 산악지대에 진을 치고 왜군의 교통로와 후방을 교란하며 전공을 세웠다. 한양이 수복된 뒤 선조명을 받아 1595년 사헌부감찰에 발탁되었다.
이어 1596년에 충청도 옥천군수와 괴산군수로 나가 부농들의 창고를 열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한 훌륭한 목민관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관군과 의병을 각 요충지에 배치하여 왜군의 진격을 막은 공훈으로 당상관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 청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임진란 의병장 출신 옥천군수 이봉·박춘무·이축
임진왜란 때 의병장 출신으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워 옥천군수에 제수된 세분 군수가 있다. 첫째로 임명된 이봉(李逢) 옥천군수는 상주 의병장 출신으로 1593~1594년 옥천군수를 지냈고 이어 1596년 괴산군수에 제수되었다.
다음은 1592년 청주 복대동에서 출청한 충청우의대장 화천당 박춘무(朴春茂) 의병장으로 1596년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박춘무 의병장은 당대 침술의 대가이다. 허준 선생에 비견되는 인물로 몽진한 의주에 불려가 선조와 왕의 가족을 시침했다. 정유재란 때는 임천군수, 인천부사, 부평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함창 의병장 출신 이축(李軸)은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옥천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란이 발발하자, 황령(黃嶺)에서 의병을 일으켜 선봉장이 되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596년 그 공으로 부여현감에 임명되었다. 뒤에 옥천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훈련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고 경충사(景忠祠)에 제향되었다. 본관은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며 호는 가악재(佳嶽齋)이다.
이봉 군수, 43번 전투 치른 백전노장
이봉 옥천 군수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이때에는 오직 우리의 방비를 다 해야 할 뿐이니 충청도 괴산(槐山), 전라도 남원(南原), 옥천(沃川) 등지에 전(前) 의병장을 보내어야 합니다. 예컨대 이봉(李逢)은 나이가 늙기는 하였으나 43번의 전투를 겪으면서 적을 살상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전에 옥천군수로 있을 적에 처사는 혹 서투른 점이 있었으나 인자로써 백성에게 임하고 청렴으로써 자기를 단속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28년 12월 28일)”라고 했다. 43번의 전투를 치렀을 정도이다.
괴산군수 때 군량 모아 명군 식량조달
또 『선조실록』에는 경상도 유생 안명남(安命男)이 상소를 하여 채유희를 이야기하는 장면에도 이봉이 등장한다. 곧, 채유희의 외삼촌인 이봉을 장수로 추대하여 적을 토벌함에 힘을 다하였으니, 2백 명 가까이 채유희가 참살하였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봉이 괴산 군수로 가자 따라가서 이웃 선비들과 함께 의곡(義穀) 1천여 석을 모아 조정에 계품하고 호조의 문부(文簿)에 기록하여 뒷날 명(明)나라 군사의 군량에 보태게 하였다고 했다. 이처럼 이봉은 부하 의병과 함께 의곡을 모아 보태기도 하고, 직접 의병장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