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마을 어귀 ‘탑’...13개 마을서 이어온 공동체 신앙

[ 충청북도 무형유산 지정예고 특집 ] 옥천 마을 탑제 ①

2026-08-19     이성열 기자



마을 어귀에 돌을 쌓고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빌어온 탑 신앙은 옥천 곳곳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2022년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충북 옥천의 마을 탑 신앙 연구』 에는 옥천지역 탑과 탑제의 모습은 물론 이를 기억하고 이어온 주민들의 구술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다. 본지는 이 조사·학술자료를 토대로 옥천 마을 탑 신앙의 다양한 모습과 그 속에 담긴 공동체의 삶을 총 2회의 연속 기획으로 살펴본다.  [편집자주]

 


 

 


옥천의 농촌마을을 다니다 보면 마을 어귀나 옛길 주변에서 크고 작은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탑을 만날 수 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오래된 돌무더기로 보일 수 있지만 주민들에게 탑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마을의 신앙 대상이다.

2022년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충북 옥천의 마을 탑 신앙 연구’는 이 같은 옥천지역의 탑과 탑제를 마을별로 조사하고 주민들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자료다. 연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주민들이 이를 흔히 말하는 ‘돌탑’이 아니라 대부분 ‘탑’​이라고 불러왔다는 점이다.


탑은 돌을 쌓아 만든 구조물에 그치지 않았다. 마을 뒷산의 산신, 입구의 장승이나 짐대(솟대), 수구맥이 등과 함께 마을을 보호하는 하나의 신앙체계를 이뤘다. 연구에서는 산신을 모시는 공간을 ‘상당’, 탑과 장승·짐대 등을 모신 곳을 ‘하당’으로 설명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마을의 무탈과 평안을 비는 대상이었다.

특히 마을 입구에 세운 탑에는 밖에서 들어오는 좋지 않은 기운이나 재앙을 막는 ‘수살’과 마을의 지형적으로 허한 곳을 보완한다는 ‘비보’의 의미가 더해졌다. 모든 탑이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마을은 안녕을 비는 의미가 강했고 다른 곳은 수살이나 비보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등 마을의 지형과 역사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탑제를 지내던 마을, 옥천 곳곳에 분포

2022년 연구서에는 당시 탑제를 지내고 있던 13개 마을이 별도의 사례로 정리됐다.
안남면 화학리 수일, 청정리, 지수2리 잔다리(세교), 안내면 답양리와 동대리, 동이면 적하리 학사골, 군북면 이평리와 자모리 윗자모실, 군서면 오동리와 금산리·사정리, 옥천읍 양수리 아랫수정, 이원면 윤정리 부르니 등이다.

 

마을어귀 신앙의 대상(안남면 지수2리 잔다리 마을 어귀 세교 탑)


여기에 현재 제사는 중단됐지만 과거 탑이나 탑제를 기억하는 마을까지 조사 범위를 넓혔다. 구술채록에는 안남면 도농1리, 동이면 금암리, 군서면 하동리, 옥천읍 수정리, 이원면 미동리, 청성면 대안리·장연리 등이 포함돼 모두 20개 마을의 이야기가 실렸다.

연구진이 탑이 남아 있는 곳만 찾은 것은 아니다. 이미 제사가 끊긴 마을에서도 노인들을 만나 언제 탑제를 지냈는지 누가 제관을 맡았는지 어떤 제물을 올렸는지 탑이 어디에 있었는지까지 기억을 끌어냈다. 현재 남은 탑만 조사해서는 알 수 없는 마을의 생활문화까지 기록하기 위해서다.


화학리, “있는 돌을 빼서는 안 된다”

안남면 화학리 수일마을에는 탑과 고목이 마을 어귀에 남아 있었다. 조사 당시 주민들은 동제가 중단됐더라도 예전에 위하던 탑이나 수살을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주민은 연구진에게 탑에 대해 “돌 하나 얹지는 못할망정 있는 돌을 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탑을 단순히 사람이 쌓아 놓은 돌무더기로 보지 않았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화학리에서는 과거 마을 뒤 산중턱의 큰 소나무에서 산제를 지냈다. 그러나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산까지 올라가기 어려워지자 산제를 탑이 있는 곳으로 옮겼다. 제사를 지내는 장소는 달라졌지만 주민들은 산신에게 이를 알리고 난 뒤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여겼다. 마을 신앙에서 산신과 탑이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청정리 산제와 수살맥이, 지수리  잔다리 탑제

같은 안남면 안에서도 탑 신앙의 모습은 달랐다.
청정리는 연구서에서 ‘청정 산제와 수살맥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됐다. 산신을 모시는 산제와 마을로 들어오는 좋지 않은 기운을 막는 수살맥이가 함께 전해졌다. 탑제는 마을 어귀의 돌탑 하나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가 아니라 산과 마을 입구를 연결하는 공동체 신앙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수2리 세교에서는 ‘잔다리 탑제’가 조사됐다. 2022년 당시 지수2리는 약 60호 규모였지만 주민 대부분이 70~80대였고 청장년층은 많지 않았다.

이 같은 고령화는 연구 자체의 필요성과도 연결된다. 탑은 돌로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순서와 금기, 축문, 제물 준비 방식은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답양리, 주민이 줄자 두 탑을 하나로

안내면 답양리의 사례는 마을의 변화에 따라 탑도 달라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답양리는 화골·논골·양지골 등 산골마을이 골짜기를 따라 자리한다. 2022년 조사 당시 각 마을은 10가구가 채 되지 않았고 대부분 고령 주민이었다. 연구진도 동제와 탑제 이야기를 해줄 원주민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기록했다.

과거 논골에는 어른탑과 아기탑이 있었고 윗터골에도 별도의 탑이 있었다. 그러나 수해로 아기탑이 사라지고 윗터골 주민도 줄면서 각각 탑제를 지내기 어려워졌다.

주민들은 두 탑을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탑을 바로 허문 것이 아니라 길일을 정해 떡을 마련하고 고사를 지낸 뒤 머릿돌부터 들어냈다. 기존 탑에서 나온 돌에 인근 계곡의 돌을 보태 새 탑을 쌓았다. 사람이 줄어든 현실에 맞춰 제사의 방식은 바뀌었지만 탑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신앙적 태도는 그대로였다.


적하리 학사골과 자모리 윗자모실

동이면 적하리에서는 여러 자연마을 가운데 학사골에서 탑제를 지냈다. 학사골은 마을 뒤편 산세가 마치 학이 앉은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이름이 붙었다. 연구에서는 탑제만 떼어 기록하지 않고 마을이 형성된 과정과 지형, 주민 구성까지 함께 조사했다.

군북면 자모리 윗자모실에는 돌탑과 선돌, 고목이 함께 있었다. 주민들은 1970년대 도로를 정비하면서 탑을 현재 위치로 옮긴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탑제를 모시는 제관(군북면 자모리 윗자모실)
탑제를 모신 뒤 풍물을 치는 주민들(군북면 자모리 윗자모실)


하지만 조사 당시 주민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탑의 보존보다 제사를 계속 지낼 사람이 줄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주민이 고령층이어서 해가 갈수록 제물을 마련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동리, 산제와 탑제·거리제가 함께

군서면 오동리는 옥천지역 마을신앙의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오동1리에서는 4개 자연마을이 함께 음력 10월 산제를 지냈다. 이와 별도로 정월 열나흗날에는 마을별로 거리제와 탑제를 지냈다. 무중골과 양촌에서는 마을 어귀의 숲에서 거리제를 지냈고 점촌에서는 탑제를 모셨다. 오동2리 질벌에서도 마을 어귀의 탑을 위했다.

점촌 주민들의 구술에는 탑을 지켜낸 기억도 남아 있다. 과거 도로를 새로 내면서 탑을 없애려 하자 주민들이 반대해 탑을 보존했다. 주민들은 정월 열나흗날 탑제를 지내면서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

탑제가 이어진 이유를 묻자 주민들은 어른들이 하던 것을 중단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오랜 신앙은 두려움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안녕을 함께 빈다는 공동체 의식 속에서 이어졌다.


돌로 남은 탑보다 중요한 사람의 기억

2022년 연구를 통해 확인되는 옥천 마을 탑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의 형태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산제와 탑제가 함께 있었고 다른 곳에서는 거리제·서낭제와 결합했다. 탑도 한 기만 있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여러 기를 세운 곳도 있었다. 도로가 나면서 자리를 옮긴 탑도 있고 주민 감소로 두 탑을 하나로 합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 속에서도 공통점은 분명했다. 주민들은 탑을 마을의 안녕과 연결된 존재로 여겼고 제사를 준비하고 함께 참여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질서를 이어왔다.

따라서 ‘충북 옥천의 마을 탑 신앙 연구’의 가치는 남아 있는 돌탑의 숫자를 확인한 데만 있지 않다. 고령 주민들이 기억하는 탑의 유래와 제사의 절차, 금기와 믿음,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제물을 마련하고 음복했던 과정까지 기록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연구서는 현재 탑제를 지내는 13개 마을뿐 아니라 이미 전승이 중단된 곳까지 찾아 20개 마을의 구술을 남겼다. 연구진 역시 구술채록이 시간이 흐른 뒤 옥천의 탑과 탑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봤다.

2022년 당시에는 평범한 농촌마을의 오래된 풍습처럼 보였던 기록들이 이제는 옥천의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설명하는 자료가 되고 있다. 이후 옥천 마을 탑제에 대한 학술논의와 무형유산 지정 논의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마을 곳곳을 찾아 탑과 주민의 기억을 함께 기록한 기초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옥천 마을 탑의 가치는 돌의 크기나 오래됨만이 아니라 그 앞에서 한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빌고 어떻게 함께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 사진 출처 : 충북 옥천의 마을 탑 신앙 연구(2022)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