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첫 농사 “농사는 나의 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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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에 첫 농사 “농사는 나의 천직”
  • 도복희기자
  • 승인 2019.07.1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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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농부인생 상야농장 송찬두 대표
안 해본 작물 없는 이젠 복숭아전문가

45년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 대부분은 그 분야에 최고의 기술과 식견을 가지게 된다. 옥천읍 송신길 157-1 상야농장 송찬두(65) 대표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었다. 20세 때부터 땅을 일구고 농작물을 심고 가꾸며 잔뼈가 굵은 것. 그는 옥천에서 제일 먼저 연동철제 하우스를 지어 농사를 지었다. 그 이전에는 대나무로 갓을 씌워서 하우스를 제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큰 비닐이 없어 작은 못자리 비닐을 조각조각 인두로 부쳐서 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2대, 3대 옥천군복숭아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20년간 상야리 작목반장으로 현재는 유통센터 복숭아공선회 회장, 복숭아수출협의회 회장, 상야리 이장 일을 맡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해 복숭아수출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복숭아 10톤을 홍콩으로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발 앞선 방법으로 농작물을 키워온 상야농장 송찬두 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만의 농사비법과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한발 앞서 나간 농사법
송찬두 대표는 안내면 답양리가 고향이다. 60년대 말 지금 거주하고 있는 옥천읍 상야리로 이주해 지역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현재는 상야리 이장직을 맡아보며 마을 행사나 주민들의 불편한 점을 돌보고 있다. 그는 옥천에서 나고 자라 땅을 일구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 왔다. 20세 농사를 처음 짓기 시작할 때는 토마토, 오이, 수박, 참외와 같은 원예작물을 주로 심었다. 그는 1970년대 대전 가수원동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나무를 구부려 터널 안에 참외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산에 가서 나무를 직접 가져와 하우스를 제작, 참외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어 70년대 중반에는 대나무를 구입해 하우스를 제작하고 오이, 토마토 농사를 지었다. 그 당시 옥천에서는 오이나 토마토, 참외, 수박 농사를 짓는 농가가 없어 꽤 소득이 되었다. 그는 심어보지 않은 농작물이 없을 만큼 다양하게 시도했다. 30여 년 전에는 육묘장을 세워 고추, 토마토, 오이 등 각종 모종을 키워 판매하기도 했다. 복숭아나무를 심고 농장을 시작한 것은 24년 전이다. 3700여 평에 1300여 그루의 복숭아나무에 익어가는 복숭아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오래된 복숭아나무를 베어내고 새로 심은 어린나무들도 보였다. 하우스 안에는 수백 그루 블루베리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6남매 맏형 가장 역할
56세에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대신해 송찬두 대표는 6남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작고하신 아버지 대신 어떻게든 동생들을 돌보고 공부시켜 독립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자신보다 동생들이 더 잘 살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설날, 추석날, 어머니 생신날 등 행사가 1년에 5번 정도 있는데 그때마다 동생들이 다 오면 30~40명씩 모이게 된다. 창고에 방도 들였다”고 기뻐했다. 송 대표는 집안의 가장으로 농사를 지으면서도 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열심히 한 만큼 소득도 따랐다. 80년 대 중반 농작물을 내다 팔아 평균 30만 원의 소득을 올렸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40년 가까이 노점에서 아들이 농사지은 것을 리어카로 끌고 가 판매했다. 송 대표는 “우리 어머니는 대단하신 분”이라며 “누구보다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사신 분”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현재 어머니 박래옥(87) 어르신은 큰아들인 송 대표의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아직도 텃밭에 나가 일하는 것을 즐기신다고.

△묵묵히 따라와 준 아내에게 감사
그는 결혼 후에도 아내(이점순·61)와 밤낮을 모르고 일했다. 낮에 농삿일을 하고 오후에 수박모종을 뽑아다가 밤 시간을 이용해 접붙이는 일을 했다. 그는 28세에 아내 이점순(당시 23세) 여사와 결혼해 딸(경아), 아들(경철) 남매를 두었다. 자녀들은 모두 출가해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자주 내려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송 대표는 농삿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묵묵히 따라와 준 아내에게 고마워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너무 힘들게는 일하지 않을 거”라며 “고생을 많이 한 아내와 여행도 자주 다니며 즐겁게 살고 싶다”고 소망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내 이점순 여사의 심정
“23살에 결혼해서 오니 막내 시동생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농삿일도 많고 돌봐야 하는 식구들도 많았다. 1980년 결혼 초 시아버지의 병환과 나의 교통사고로 집안에 우환이 한꺼번에 닥쳤다. 병원비만 당시 300만 원이 나왔다. 경제적으로 힘에 부쳤다. 결혼반지를 팔아 병원비를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남편이 마음으로 위해 주는 것을 느꼈다는 이 여사는 “때문에 힘들거나 상황이 싫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는 큰 소리 한 번 안치고 싸움을 한 번도 안해봤다”고 남편에 대한 신뢰를 내비쳤다.
“농사짓는 것은 재밌다. 하고 나면 보람 있고 표시가 있다. 농사를 지어도 출퇴근하는 마음으로 한다. 시간을 정해 놓고 하니 일도 더 빨리 줄어드는 것 같이 느껴진다. 농사터가 ‘내 직장이다’라고 생각하면 맘도 가볍고 생산성도 높아진다”고 강조하는 이 여사는 농부의 아내다웠다. 농사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전문적으로 시간을 활용해 사용하면 능률적이고 시간을 아껴 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 “나가서 보고 듣고 하는 게 많아 모든 일을 현대식으로 하니 일이 수월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마음 편하게 해주고 신경 안쓰게 해줘 감사하다”고 평소 마음을 전했다.

△지역발전에 대한 견해
옥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 옥천은 대전 근교 지역으로 우리 지역의 발전을 위해 대전을 활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도시철도가 개설되면 옥천의 상권이 대전으로 뺏길 거라고만 우려하는데 옥천의 볼거리 먹거리를 만들어 대전 인구가 이곳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적극적 유치가 필요하다.
또한 복지정책에만 의존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사회 풍조로 더 잘 사는 사회로 진입하길 바란다는 희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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