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중봉(重峯) 조헌(趙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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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중봉(重峯) 조헌(趙憲)
  • 박금자기자
  • 승인 2020.06.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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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조헌 선생은 문묘(文廟)에 배향된 조선 중기의 학자로 330수의 한시와 3수의 평시조가 전해오는데, 이 시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선생의 대표적인 시조이다. 임진왜란을 맞아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실 때까지 49년의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절의(節義)를 위해 신명을 다하는 행동하는 선비였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선생이 지향했던 애국· 애민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되새기고자 조헌 선생의 일생을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여름을 알리는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장계리 향토전시관에 도착했다. 조종영(白川趙氏文烈公宗會 회장, “예”육군대령) 선생과 전순표(충북 옥천향토사연구회) 회장님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을 통해 듣게 된 파란만장한 선생의 생애와 위대한 업적은 매우 감명 깊었다.
 
△ 효성 지극한 공부벌레 조헌의 어린 시절
중봉 선생은 1544년(중종39년) 6월 28일 경기도 김포 감정리, 빈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농사도 거들고 나무를 해서 방을 덥혀 부모를 모시는 행실이 남달랐다. 그는 아궁이의 불빛으로 책을 읽고 들에 나가면 논두렁에 책을 올려놓을 책받침부터 만들었다. 그의 나이 다섯 되던 해, 동네 아이들과 집 근처 임정(林亭)에서 천자문을 읽고 있을 때였다. 사또의 행차를 알리는 요란한 나팔 소리에 아이들은 다투어 밖으로 나갔지만, 중봉은 오로지 글만 읽고 있었다. 이를 본 사또가 정자에 올라 그 이유를 묻자, 의연한 대답에 감동하여 부친 응지(應祉)공을 찾아가 예를 다하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큰 선비가 되어 세상에 도(道)를 심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차 씨(車氏)를 여의고 감내할 수 없는 슬픔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애모(哀慕)하였다고 한다. 엄한 성품의 계모 김 씨를 맞아서도 친어머니와 같이 공경하고 극진히 섬겼다, 계모는 중봉이 순절한 뒤에 “어찌 이런 훌륭한 인물이 세상에 다시 있으리오, 슬프도다 참 내 아들이다.” 하며 밤낮없이 슬피 울부짖었다고 한다. 중봉은 유년시절부터 이미 의연한 현자(賢者)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 학문에 목마른 젊은 선비
늘 학문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던 중봉은 좀 더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22세에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한다. 2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홍주목 교수(洪州牧敎授) 시절에 토정 이지함 선생을 만난다. 토정은 중봉의 학식과 인품을 높이 사서 당대의 일등 인물이라고 굳게 믿었다. 토정의 권유로 율곡과 성혼을 찾아뵌 중봉은 평생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세 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인 세 분의 스승에게서 공부한 중봉의 학문은 깊은 경지를 이룬다.
 
△ 파란의 관직 생활과 충북 옥천에 안거
29세 때 교서관정자 시절, 불공에 쓸 향(香)을 들이라는 안순왕후(仁順王后)의 명을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거절하자 삭탈관직을 당한다. 다음 해에 복권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사행기인 조천일기(朝天日記)을 남겼고, 서자의 기용, 과부의 재가 허용 등 개혁적인 내용의 동환봉서(東還封書)를 올렸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義)로운 일에 굽힐 줄 모르고 바른말을 일삼는 중봉의 관직은 항상 낮은 곳에 머물렀고 권력자들에게는 지탄의 표적이 되었다. 그 후 통진 현감, 사헌부 감찰, 전라 도사 등을 제수 받고 158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홀로 된 계모를 모시려고 외직을 요청한다. 이때 보은 현감에 임명된 것이 옥천과의 인연이 되었다. 호서지방 최고의 지방관으로 인정받은 중봉이 재임하자 반대파의 끊임없는 상소에 결국 선조는 중봉을 해임하고 만다.

세상과 결별하고 싶었던 중봉은 인적이 없는 깊은 산골 충북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에 후율정사(後栗亭舍)를 지었고, 충북 옥천군 군북면 각신리에 각신서당(覺新書堂, 현 이지당)의 현판을 걸었다. 이곳에서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과 정세를 논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까지 한 차례 공주 제독에 임명되었으나, 주로 이곳에 안거하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

중봉이 조정에 올린 수많은 상소와 더불어 도끼를 메고 올린 지부상소(持斧上疏), 함경도 길주 유배, 임진왜란 의병의 태동 등 모두가 충북 옥천에서 이루어졌고, 이곳에 그의 뼈를 묻었으며 후손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 임진왜란의 예견과 목숨 바친 의병활동
중봉 선생의 남다른 선견지명(先見之明)은 평소 갈고닦은 깊은 학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찍이 정여립(鄭汝立)의 역모를 예견하였고, 왜적의 침범을 미리 간파하고 조정을 일깨우려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린다. 일본과의 통호를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청절왜사소(請節倭使疏)와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엄을 보이라는 청참왜사소(請斬倭使疏)이다. 시폐를 논하는 상소가 화근이 되어 함경도에 유배간 중봉은 유배지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영호남비왜지책(嶺湖南備倭之策) 올렸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했다. 왜란이 일어나고 적의 침략이 중봉의 예견대로 전개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조가 이를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중봉은 제자와 문인 등과 의병을 일으켜 세 번의 주요 전투를 성공으로 이끈다. 1592년 5월 말, 옥천과 보은 등지의 향병으로 보은 차령(현·수한면 차정리)에서 왜적을 물리친다. 8월 1일에 1,600여 명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으로 청주성을 공격하여 이를 회복한다. 이를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는 극심했다. 결국은 흩어지고 남은 의병 700명과 영규대사의 승병 300명이 합세하여 호남순찰사 권율(權慄)과 8월 18일에 금산의 왜적을 공격하기로 했다. 의병이 금산 외곽에 도착했을 때, 기일을 연기하자는 권율의 연락은 도착하지 않았고, 적은 의병부대를 기습해왔다. 이날, 왜적과의 처절한 전투에서 칠백 명의 의병들은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 중봉과 함께 모두 순절했다. 아들 완기(完基)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대장복을 갖추고 앞장서 싸우다가 시신마저 갈기갈기 찢겨 형체도 남지 않았다. 피할 것을 권유하는 제장들에게 중봉은 내가 죽을 자리는 이곳이라며 스스로 말안장을 내렸다. 왜군도 큰 피해를 입고 철수, 호남의 곡창지대를 죽음으로 지켜낸 것이다.
 
△ 충북 옥천, 중봉의 유적지에 가다
조종영 선생과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위치한 중봉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에 오르는 돌계단과 묘소 주변에는 그의 기개와 절개를 말해 주듯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곳에는 묘소를 중심으로 표충사(表忠寺), 신도비(神道碑), 영모재(永慕齋) 등의 도지정문화재와 하마비(下馬碑), 말 무덤 등이 산재해 있다.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後栗堂)은 용촌리의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뜰안에 중봉의 충신정려와 아들 완기의 효자정려가 있다. 군북면 이백리의 선생이 강학하던 이지당(二止堂)은 본래 이름이 각신서당(覺新書堂)으로 선생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옥천에서 중봉을 배향했던 서원은. 이원면 이원리 창주서원(滄洲書院), 강청리 삼계서원(三溪書院), 청산면 하서리에 덕봉서원(德峯書院) 세 곳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훼철되고 송시열 선생이 쓴 창주서원 묘정비(廟庭碑)만 서원 터에 남아있다. 조종영 선생은 이외에도 서울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의 234개 향교, 12개 서원과 10개의 사당에 배향되었으나 서원의 일부는 훼철되었다고 설명한다.

조종영 선생은 2019년 중봉 조헌과 그의 의병들을 기록인 ‘지당에 비 뿌리고’를 출간해서 선생의 위대한 삶과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중봉 조헌의 묘소
중봉 조헌의 묘소
여름날 한적한 이지당
여름날 한적한 이지당
조헌 선생 영정사진
조헌 선생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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