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상태바
섭지코지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0.07.23 0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옥임 수필가
지옥임 수필가

 

거리낄 것 하나 없는 망망대해다. 기암절벽과 철석거리는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2km나 되는 언덕에 들쑥날쑥 이리구불 저리구불 끝이 보이지 않게 세워진 난간대를 잡고 걷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대전에서 살다 넓은 바다를 보니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다.

아마도 상황이 달라져 만물이 새롭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병이 들어 투병중인 엄마에게 아들이 효도 차원에서 여행을 시켜준다기에 남편과 함께 따라 나선 길이다. 그동안 여행사에 의존하여 수박 겉핥기식으로 제주도를 여러 번 다녀왔으나, 이번에는 아들이 완벽하게 세운 계획표에 의해 제주도 전 지역을 샅샅이 둘러볼 계획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다. 세대 차이는 굴복할 수가 없음도 실감했다.

제주도 동남쪽에 위치한 해변에 도착하니 섭지코지라는 드넓은 초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20여만평의 자연공원이다. 워낙 넓으니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마차를 운전하는 아저씨는 친절하게 이곳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섭지는 바다를 향해 툭 튀어 나와 자루처럼 생겨 끈으로 묶은 것처럼 목이 좁은 땅이라는 뜻이란다. 코지는 곳이라는 제주 방언이라 하여 좁은 땅이 있는 곳, 섭지코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바로 옆으로 성산일출봉이 눈앞에 바싹 다가선다. 바람의 언덕, 갈대밭, 모래언덕, 잔디광장, 주변의 숙박시설이 잘되어 있으며 모랫길과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제주도에는 워낙 돌이 많다보니 쓸모없는 돌들을 모아 탑을 쌓아놓고, 제주도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중간에 마차에서 내렸다. 내리는 순간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스피커는 보이지 않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다.

돌무더기를 보니 쓸데없이 주책스러운 생각이 난다. 이곳에다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자란 시골에도 돌이 많았다. 사람들은 우리 동네는 전답들이 흙 반 돌 반이라고 말을 하곤 했었다. 밭을 매면서 골라낸 돌로 밭둑을 쌓고도 돌을 주체할 수 없으면 밭 가운데다 돌무덤을 쌓아 놓기도 했다. 호미로 밭을 매면 호미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 했다. 돌들이 우좀을 싸 곡식이 잘된다는 일화도 있다. 돌밭일지라도 곡식이 아주 잘 되었다. 그 어려운 보릿고개 시절에도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산으로 고사리를 꺾으러 가면 돌무덤을 쌓아 놓은 곳이 가끔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곳을 만나면 아무리 고사리가 많아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다. 산속의 돌무덤은 아이들이 죽으면 묻고 난 뒤 그 위에다 돌을 쌓아 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쌓아놓은 돌무더기들이 꼭 애기들 무덤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제주도의 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아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좋은데 와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엄마 저기 좀 봐.”하며 분위기를 바꾼다.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드라마 올인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이란다. 귀가 번쩍 뜨인다. 몇 년 전에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올인 촬영장을 본 적이 있다. 그때도 너무 좋아서 꿈같기만 했었다.

이곳에도 바다와 어우러진 초원과 세트장, 예쁜 등대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너무 아름답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떻게 상황에 맞는 곳을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그들 덕분에 우리 같은 사람까지 이런 아름다운 곳을 구경할 수 있어 감사하다.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망아지들이 한가로워 보인다. 그림 같은 등대 아래로 나 있는 길에는 관광객들이 바다와 초원을 향해 플레시를 터트리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 이병헌 송혜교가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다는 발자국에 서서 재연을 하며 젊은 사람들 흉내를 냈다. 아들이 시키는 대로 생전 해보지 않은 짓을 해가며 환경과 분위기에 취해, 내가 병든 것과 나이든 것까지 망각했다.

평화로운 땅 섭지코지는 눈길이 가 닿는 곳마다 아늑하다. 항상 쫓기는 듯 살아오던 내 마음이 이곳에 오니 여유가 생긴다. 어디를 가도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며칠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곳이라면 내 노후를 후회 없이 보낼 것만 같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