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부터 구두와 함께 한 ‘구두수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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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부터 구두와 함께 한 ‘구두수선공’
  • 이성재기자
  • 승인 2016.06.23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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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대전 ‘이화양화점’서 구두 만드는 일 시작
1995년 보건소 앞 사거리에서 구두 수선 집 개업
“교복입고 오던 학생손님, 이젠 중년 신사가 돼…”
옥천읍 구두종합병원 이근복(67)씨.

 선배의 어깨너머로 구두 만드는 기술 배워 

옥천군보건소 앞 사거리에 가면 구두병원이 있다. 주인장은 구두박사 이근복(67) 사장이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속설이 있다. 좋은 신발을 신어야 발이 편안하고 일의 능률과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는 소리다. 신발을 건강하게 고쳐주는 곳이 있다. 바로 구두 수선
집이다. 수선 장인의 손을 거치면 거의 못고치는 신발이 없단다. 자신 있게 “일단 가져와 보시라. 여긴 구두 종합병원”이라고 말한다.

이근복씨의 구둣방은 한적한 편이다. 예전에 비해 찾는 고객이 줄었기 때문이다. 양화와 양복이 한창 유행하던 60년대 그는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이 되던 해 수제화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숨은 사연이 많은 듯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려다가도 다시 닫아버리는 것을 반복했지만 평생 구두만 바라보고 산 것은 분명했다.

이 씨는 “내 이야기를 들어서 뭐하냐”고 부끄러워하면서도 구둣방 일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주위에 권유로 대전역 앞 ‘이화양화점’으로 구두를 만드는 일을 배우러 갔다. 그러나 구두를 만들기까지의 세월은 만만찮았다.

처음에는 선배의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는, 말 그대로 견습생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의 연속이었고 칼에 손이며 무릎 등을 베이는 게 일쑤였다. 하견습, 중견습, 상견습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세월을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받아가며 잔심부름이나 해주며 견뎌야 했다.

찹쌀풀을 끓이는 일만 3년 가까이 했다. 쓰고 난 못을 망치로 두드려 펴고 가죽을 자르는 칼을 가느라 몇 년, 실밥을 따고 본드 칠을 하는 잡일을 하며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재봉틀로 실을 박는 상견습에서 디자인과 재단을 하는 갑피사가 되기까지 또 다시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는 “상견습이 돼 재봉기술을 배우면서 벌이가 좋아졌다”며 “기술자들은 월급제가 아닌 도급제라서 만든 만큼 돈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구두에 덧붙일 헝겊을 재봉질 하는 모습.

1995년 운영하던 ‘화성양화점’ 문 닫아

1981년 옥천으로 이주한 이 씨는 ‘화성양화점’이라는 자신의 가게를 옥천역 앞에서 개업했다. 인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개업하다 보니 자신이 만든 구두를 홍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구두가 튼튼하고 오래 신을 수 있는 제품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 됐다.

이 씨는 “그 당시 소 장사하던 사람들 중에 내가 만든 신발을 신지 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며 “소 장사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신발이 튼튼해야 하는데 내가 만든 신발이 워낙 튼튼하고 오래신을 수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장사가 잘 되는 그의 가게가 소문이 나면서 옥천역 인근에 2개의 수제화 가게가 생기는 등 옥천에만 7개의 수제화 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초부터 수제화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구두상품권의 등장으로 브랜드 제품이 넘쳐나고 고급 수입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1995년 그는 운영하던 ‘화성양화점’의 문을 닫게 된다.

그는 “철이 들기 전부터 해왔던 일을 막상 접자니 ‘앞으로 뭐해 먹고 사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구두와 관련된 일을 찾다보니 구두수선과 닦는 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게 앞에서 촬영하고 있는 이근복씨.

허름하고 좁은 장소이지만 소중한 ‘삶터’

양화점 문을 닫은 그해 바로 현재 자리에 구둣방을 열게 됐다. 그는 보건소 앞 사거리 한 구석에 알 듯 모를 듯 조그만 공간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 그는 한 평 남짓한 구둣방에 앉아 있을 때 문 밖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면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비록 허름하고 좁은 장소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한 너무나도 소중한 ‘삶터’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시끄럽고 마음이 불안할 때도 구둣방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위안을 받는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삶터’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이 일은 비위가 약한 사람은 못한다”며 “손님들 발 냄새에 본드나 구두약 같은 것도 화학제품이라 냄새가 고약하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잘 고치거나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본 손님들이 고마워하면 냄새고 뭐고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손님들이 다녀갔다. 끊어진 가방끈을 다시 고치러 온 아주머니, 근처 사무실에서 구두를 닦으러 온 아저씨, 구두의 굽을 갈러 온 아가씨 등 손님들이 들어설 때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오랜 단골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씨는 “이 자리에서만 21년 동안 일을 하다 보니 손님들의 대부분이 단골”이라며 “작은 구둣방이지만 절 보고 찾아와주시는 분들이 항상 고맙다”고 웃어보였다.

그는 구두를 수선하는 것도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특히나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닦는 것보다 수선을 맡기러 오는 분들이 많아, 손님의 스타일에 맞게 센스를 발휘해야만 마음까지 만족하는 수선이 된다는 것이다.

이 씨는 “21년간 별의별 사람과 신발을 봤다. 수백 수천 개의 신발을 고치면서 이제는 별 생각 없이 수선을 한다”며 “하지만 유독 해진 신발을 꿋꿋하게 수선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더듬어 보게 된다”고 말했다.

구두를 닦고 있는 모습.

단골 위해 힘닿는데 까지 구두수선

구두수선공들은 자신들의 기술과 경험을 믿고 구두를 맡겨주는 손님들을 만날 때마다 힘이 난다고 한다. 이 씨는 “손님이 가게로 들어오면서 ‘구두 고쳐주세요’라고 말할 때 기쁜 마음이 든다”며 “하지만 이미 손님이 구두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자기 생각대로 고쳐줄 것을 요구할 때는 의사와 환자의 역할이 바뀐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가격도 비교적 저렴하다 보니 수명이 다 됐는데도 ‘못신어도 되니까 고쳐나 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님들이 있는가 하면 비싼 신발 상태와 비교하며 언성을 높이는 손님들도 있다. 이럴 때는 손님이 구두수선공들을 신뢰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진다.사실 손님이 가져온 신발 반 정도는 수선이 불가능하다.

이 같은 현상은 질이 좋지 않은 중국산 제품이 늘면서 더 그렇다. 최근에는 신발을 닦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일할 수 있는 시기도 실질적으로는 줄었다. 예전에는 토요일 오후 정도면 구두 수선이나 닦는 일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5일 근무제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여가를 보내느라 발길이 뜸해졌다. 사실상 구두수선공들도 금요일 오후면 업무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그래도 이 일은 돈과 상관없이 계속돼야 한다는 게 이씨의 말이다. 좋은 신발은 AS센터에서 고치면 되지만 질이 떨어지는 신발들은 구두 수선대가 아니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씨는 “다른 가게에서 수선을 받다가 버려서 온 구두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손님이 구두를 가지고 왔을 때 돈이 들어간 만큼 신을 수 있지 않으면 수선하지 않고 새로 구두를 사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이어 “단골손님들을 위해 힘이 닿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 구두를 수선하고 닦고 싶다”며 “손님들과 만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에 오랫동안 가게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구두를 신고 사는 이상 평생 들러야 할 구두 수선 방. 누군가에겐 구두 굽을 갈기 위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그에게는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녹아 있다. 고단했던 삶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의 고린내를 평생 맡으며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그만의 장인정신 때문인 것 같다. 이제는 가볍게 스쳐갈 수만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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