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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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지게
  • 옥천향수신문
  • 승인 2016.06.2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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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옥 시인·수필가

어느새 여름의 문턱에 성큼 들어서고 있다. 연두에서 진초록으로 자꾸만 색을 바꾸는 나무들은 서로 햇빛을 받으려고 야단법석 떨고 있다. 지천에는 농부의 땀방울처럼 번져 핀 개망초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언덕배기 포도밭에서는 또랑또랑 청포도가 파랗게 익어가고, 허리 굽힌 농부의 구릿빛 살갗도 과육처럼 익어간다.

아버지는 농사 일 밖에 모르셨다. 팔십 여년 삶을 사시면서 한 몸처럼 지게를 지고 다니셨다. 주무 실 때 빼고는 주저앉은 활대처럼 휘어진 아버지 등에는 삶에 무게가 지워져 있었다.

"아이고 삭신이야"
"비가 올란게벼"

밤새 머리맡에 잔기침만 쏟아 놓았던 아버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들일 나가시는 아버지, 어린 송아지 앞장세우고 어미 소와 어스름 새벽길을 나서셨다. 커다란 지게에 묻혀 다리만 보이셨던 아버지의 지게에는 부석한 겹 시름 만 한 짐 가득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세월을 등에 지고도 새살이 차오르지 않는 그리움으로 먹먹히 다가선다.

싸락눈이 내리고 서럽도록 푸르른 봄 쑥이, 시린 눈 깜빡거리며 노오란 개나리가 담장을 넘을 때면, 솜씨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일 년 농사를 짓기 위해 지게를 고치고 만드셨다. 단풍이 노을처럼 물들었던 지난 가을에 고르고 골라 곧고 단단한 노목의 밤나무를 잘라 그늘에 서 너 달 말리고 다듬었다.

지게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력에 의한 운반 연장으로 꼭 필요한 필수품 이었다. 지게몸채는 가지가 달린 자연목 두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벌려 나란히 세우고 그 사이에 서 너 개의 세장을 끼우고 탕개로 조여서 고정시켜 놓았다.

아래위로 질빵을 걸어 어깨에 메도록 했으며 등이 닿는 부분은 짚으로 짠 등태를 달았다. 부스러기 짐을 나르고 운반 할 때 쓰였던 달채(바수게)는 여름내 잘 자란 싸리나무를 베어다 껍질을 벗겨 내고 굵은 가지는 반으로 쪼개고 엮어서 혼을 불어넣듯 온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그리고 윗부분이 잔가지가 있는 적당한 곧은 나무를 골라 지게작대기까지 만든 지게를 싸리문 옆에 세우셨다. 당신의 분신으로 한 평생을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고 옹이 박히도록 한 몸 되어 지게처럼 낡아 가셨다.

가뭇한 기억 속에 일생을 같이했던 지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었을 터, 긴긴 세월 뾰족했던 아버지의 삶에 무게가 세월의 무게였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눅눅해진다. 흥건히 땀에 젖어 벗어놓은 지게에선 풋풋한 풀냄새와 찝찔한 맛과 비릿한 냄새가 났고 소금기마저 서걱거리던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시려 온다.

어느 겨울날이었다. 갑자기 어두침침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모아두었던 눈을 쏟아 내려는지 윙 윙 윙 소리를 내며 폭설이 쏟아졌다. 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보다 더 하얀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아버지가 나무하러가셔서 돌아오지 않았던 터라 마중을 나갔었다. 한참 지나서야 동네 어귀에 허적허적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오시는 아버지 지게의 나뭇단 위에는 하얀 눈이 소복했었다.

반가움에 “아버지” 불렀더니 “어이 추운데 집에 있지 않고, 어 여 가” ‘휴’ 순간 안도의 한숨과 가슴에선 뜨거움이 울컥하였다. 하얀 눈보라 속에 꽁꽁 언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은 검붉다 못해 시퍼렇게 멍들어있었다.

웃옷을 벗어 건네시던 아버지의 손은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딱딱했었다.
그날의 아버지 옷자락에 묻었던 한기를 잊을 수가 없다. 여름 햇볕이 따갑게 내려 쬐는 마당가, 하늘을 보니 청명한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산과 맞닿아있다.

대문 앞을 나서기만 하면 녹음에 묻힌 산사처럼 사람도 성장을 한 초록 세상에 안겨 있음을 본다. 꽃밭에는 백일홍, 원추리, 봉숭아, 채송화 등 꽃 들이 촉수를 세우고 한창이다.

그 한 켠의 아버지의 지게에는 봄에 심었던 꽃이 한 짐 피어있다. 그렇게 여름은 깊어가고 땀방울로 터전을 내셨던 아버지의 지게에는 겹 시름대신 꿈을 잉태한 꽃이 한 짐 가득하고 추억의 한 자락을 지고 있다.

어느새 나의 머리에도 하얀 눈이내렸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의 남은 삶은 무엇으로 채울까 생각해보니 사람은 자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것임을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당신의 땅에서 계시는 듯하고 아버지의 자식들은 그 자리에서 그때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듯하다.

꽃은 소리 없이 피었다지고 연둣빛이 붉은 빛의 어제가 되고 붉은빛이 오늘의 연둣빛이 되는 계절의 반복을 보며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신 지금도 "땅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해가 갈수록 퍼내도 마르지 않는 펌프 물처럼 울컥거린다. 세월의 뒷자리에 밀려 난 낡아진 아버지의 지게를 보면 요즘 들어 유난히 흑백사진첩같이 갈피마다 그리웁다.

 

■ 약력
· 문학저널 시 신인문학상 등단
· 시집 『시간의 그늘』
· 옥천의 마을 시집 공저
· 옥천문협 회원, 문정 문학회 회원
· 옥천군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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