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익 전 옥천군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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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익 전 옥천군의회 의원
  • 김병학기자
  • 승인 2020.09.10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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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보다는 남과 같이 사는 삶”

두 번의 당선보다는 한 번의 낙선이 더 큰 경험
흐트러진 마음 다잡으로 시간만 나면 국궁장으로

 

 

두 번(제6회, 제7회)의 군의원, 한 번의 부의장(제6회 후반기), 최연소(제6회) 당선.


옥천군 청산면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청주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친 안효익 전 옥천군의회 의원(55).

“대학 졸업 후 증권회사에 다니다 IMF때 퇴사해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생선가게는 6개월만에 접어야 했으며 이후 다시 도전한 문구점 역시 인근에 들어선 중대형 마트들은 저의 목을 죄이는데 완성맞춤이었습니다”


두 번의 사업에 도전했으나 그때마다 줄줄이 문을 닫아야만 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아마도 나라는 사람은 사업체질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어쩌면 천성적으로 이재(利財)와는 거리가 멀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인생 항로 바꿔

그러한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안 전 의원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안 전 의원 자신이 바꾼게 아니라 현실이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고 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이력(?) 때문이었지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사업을 하기보다는 고향발전을 위해 젊음을 불사르는게 훨씬 더 유익하고 체질에 맞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고향 청산면을 중심으로 안남·안내·청산면이 선거구인 제6회 옥천군의회 다선거구에.


물론 학교가 아닌 주민을 상대로 치러야 하는 군의원선거였기에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주민들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가도 꼼꼼이 수첩에 기록했다. 더욱이 다른 후보들과 달리 ‘정직’과 ‘신뢰’ 하나만을 무기로 내세우고 오로지 가족들의 도움만 받아가며 벌인 선거운동이었기에 결과는 너무도 값졌다. ‘당선’이라는 열매는 선거기간 동안 겪었던 모든 것들을 보상해 주었다.


이후 제7회 선거에서도 무난히 당선이 되었다. 그런데 삶이라는게 참으로 얄궂었다. 누군가가 귀띔을 했다. ‘두 번씩이나 군의원을 지냈으니 이제는 좀 더 큰 정치를 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맞는 말도 같았다. 솔깃했다.


그래서 다선거구를 접고 과감히(?) 옥천읍이 선거구인 ‘가선거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결과는 참패였다. 남들은 듣기 좋으라는 말로 ‘정당도 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자와 403표 차이 밖에 안났다’느니, ‘이런 기세라면 다음에는 반드시 (당선)될거라’느니 하는 말로 위로를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낙선은 낙선이었다.

 

한 표든 천 표든 낙선은 낙선이 아닌가. 차라리 다선거구에 그냥 그대로 나섰더라면 충분히 당선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때늦은 아쉬움만 밀려 왔다.


자신을 지지해 준 유권자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낙선이라는 모든 결과가 오로지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된 것만 같아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우울증마저 덮쳐 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러한 어릿광에 머물 수 만은 없었다. 당장에 먹고 살아가야 할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아무리 군의원을 두 번씩이나 지냈다고는 하나 지금은 엄연한 ‘자연인’. 사업은 체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직장을 찾았다. 처음 서류를 접수한 회사에서는 분명히 자리가 비어 있다고 했는데 거절을 했다.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전직 군의원을 직원으로 채용한다는게 조금은 껄끄러웠을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취업에 대한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일. 이번에는 교통약자들을 태워다 주고 태워 오는 일명 ‘장애인콜택시’ 직원 모집에 응시했다. 고맙게도 합격이었다.

약자들을 보듬고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또 다른 체험

“그동안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던 제가 장애인들을 직접 부축해서 집까지 바래다 주고 나올 때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엄청난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혼자만의 안위보다는 약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보듬고 위로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오로지 장애인콜택시를 운전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인생체험 아닐까요”


이러한 안 전 의원에게도 말못할 아픔이 있다. 기껏 집까지 바래다 주었더니 손찌검과 욕설을 할 때면 아무리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해 간다고는 하지만 억장이 무너진다. 그래도 참는다. 아무리 욕을 하고 대들어도 참는 것이 이긴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무조건 참는다. 그래서 지금은 누가 무슨 시비를 걸어와도 참는다.


그래도 안 전 의원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못난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한다고 말하는 딸과 아들, 거기에 평생 동반자이자 친구처럼 살아가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딸은 자신이 먼저 군인이 되고 싶다며 해군부사관 시험에 합격, 진해 해군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고 아들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아내도 직장에 다니고 있다.


“취미요? 아마도 국궁만큼 매력적인 스포츠도 드물다고 봅니다. 국궁은 여느 스포츠와 달리 조금만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불안해도 결코 명중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정신과 몸이 하나로 될 때만 목적 달성이 가능한 스포츠입니다. 지금도 일과만 끝나면 흐트러진 제 마음을 다잡으러 국궁장으로 달려갑니다”


차기 군의원 출마 생각은?


“저는 지금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물론 두 번의 군의원을 지낸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자만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유권자들의 고통과 아픔, 나아가 5만 옥천군민의 삶의 질 향상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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