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역사인물-서사 전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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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역사인물-서사 전식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09.1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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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나라에 큰 환난이 닥쳤을 때 항상 이 나라를 지켜냈던 것은 민중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 의해 전 국토가 황폐화 됐을 때 선조는 신의주로 피신했지만 백성들은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병자호란으로 청군들이 조선을 침략 했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지만 백성들은 또다시 의병을 조직해 맞서 싸웠다. 그중엔 무인이 아닌 문인의 몸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모두 의병을 일으켜 진두지휘한 사람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전식이다.

사서 전식 선생의 본관은 옥천으로 1563년 이조판서 전여림의 아들로 태어나 1589년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합격과 수학의 기쁨도 잠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을 모아 나라를 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수많은 왜적을 토벌해 공을 올렸으며 이후 김응남의 추천으로 연원도 찰방 자리에 오른 후 승승장구해 전라도 도사까지 된다. 하지만 당시 유학과는 맞지 않았던 광해군의 정치에 실망해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 이준 등과 산수를 유람했다. 인조반정의 성공 이후 다시 관직에 올라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천안까지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집의가 되었고 이후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귀향했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 등 쟁쟁한 자리에 다시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했다. 이렇듯 여러번 벼슬을 거절한 그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일흔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다시금 의병을 일으켜 전선에 나섰다. 이후 전식 선생은 끊임없이 관직을 사사받으나 계속해서 거절한다.

죽음을 불사하고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전선에 나서 진두지휘 사서 전식 선생의 애국심, 관직을 뒤로한 채 왕에게 올렸던 간언들은 현대의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한편, 현재 동이면 금암리 목담서원에 배향된 전식 선생의 초상화는 19921023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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