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재산목록 1호는 몽당붓 300여 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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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재산목록 1호는 몽당붓 300여 자루”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09.17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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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화가, 강사, 골동품 수집가까지
넘치는 열정의 아이콘 평거 김선기 선생

 

평거 김선기(65) 선생의 서예 인생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날,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섭기로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이 그의 서예 습작 무궁화 삼천리를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선 서예에 대한 열망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초등학생이라면 몇 주 연습하는 척 하다 그만뒀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어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도 계속됐다.

 

 

넘치는 열정으로 야심 차게 연 서예학원

초등학생 때부터 십수년간 붓글씨를 써온 그지만, 제대 후 3일 만에 든 붓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촉감에 나는 아직도 초심자 같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수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곧바로 주변 사람들을 모아 당시 거주하던 대전 집 골목에 교습소간판을 붙이고 무료 서예 수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예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4~5명의 소규모 그룹으로 시작한 교습소는 그의 탁월한 강의력에 힘을 얻어 기하급수적으로 학생이 늘어났고 그는 자리를 옮겨 학원을 설립했다.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서예 실력도 빨리 늘고 감각도 금방 되찾았다.

 

현재 평거선생이 거주중인 고택
현재 평거선생이 거주중인 고택

대전에서 옥천으로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많은 사람의 환호 속에 시작한 학원 운영이 항상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1986, 5년간 운영한 학원은 재정상의 문제로 폐원하게 됐다. ‘많은 사람에게 서예의 매력을 느끼려 사비까지 아낌없이 투자한 학원이었는데.’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단맛 쓴맛 다 느껴본 그지만 왠지 폐원된 학원 건물을 바라보자니 갑작스레 허무함이 밀려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질적인 감정에 그는 잠시 휴식 기간을 가지리라.’ 마음먹었으나 막상 이 시간을 즐기려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때마침 대전과 옥천을 오가는 버스가 있는 것을 알고 잠시 옥천에서 바람도 쐴 겸, 마음도 가다듬을 겸 옥천행 버스에 올랐다.

옥천에 내려 한참을 둘러본 그는 불현듯 !’하고 탄성을 질렀다. 서예 학원도 없을뿐더러 즐길 거리가 많이 없었던 옥천에서 다시 서예를 가르치며 군내 문화도 활성화 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야 말로 삶의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옥천에서의 정착을 결심했다.

 

평거선생이 일생동안 사용해온 몽당붓 300여자루
평거선생이 일생동안 사용해온 몽당붓 300여자루

 

옥천 정착 그리고 작품 세계

옥천에 들어온 평거 선생은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 전통의 개념에서 과감히 벗어나 독창성과 개성이 두드러진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가 써온 붓만 300여 자루. 그는 인터뷰를 통해 아직도 내 재산 목록 1호는 나의 붓 300여 자루다라고 밝혔다. 그 실력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1995년 국전을 비롯한 대전시전, 충북도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역할도 맡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1999,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꿈꿔볼 전주 비엔날레 본전시 초대전 작가와 선정위원으로도 초대됐다. 또한 1994년에 자랑스러운 군민상1997년엔 옥천군민대상을 받았다.

현재 평거선생이 거주중인 고택은 조선의 큰 부자인 김기태씨가 건립한 건물이다. 이후 한치봉 선생이 구입해 옥천여자 전수학교에 기증했다. 1950년 옥천 여자 중고등학교로 변경, 당시 육영수 여사께서 교편을 잡았을 때 학교 교무실로 사용했다. 또한 내사랑 내곁에라는 노래로 유명한 고 김현식은 외가인 이 집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현재는 평거선생이 온 정성을 다해 관리중이다. 그는 수시로 문화재청, 도청, 군 관계자들께서 찾아와 문화재로 신청 할 것을 요구하며 설득하고 있으나 아직은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2009년 순조임금 상량문과 중수기 필사

2009, 서울, 경기, 강원도 등에 퍼져있는 조선왕릉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려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시행하던 어느 날. 조선 23대 왕 순조의 능인 인릉에서 상량문과 중수기가 출토됐다. 문화재청은 출토된 상량문 및 중수기 원본은 보존을 위해 회수함과 동시에 평거 선생에게 비어있는 자리를 대신할 필사본을 부탁했다. 처음엔 크나큰 부담감에 직접 문화재청까지 가서 거절했으나 임금님 일은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라는 말에 생각을 바꿔 수락했다. 매일 새벽 목욕재계를 하고 향을 피운 후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상량문과 중수기를 필사했다. 5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그가 쓴 연습문은 2m 길이의 종이 300여 장과 고급 명주 천 150m. 커다란 부담감과 살인적인 연습량에 그의 몸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5개월 동안 쓰러지기만 두 번. 특히 한번은 수혈을 여섯 팩이나 받을 정도로 내출혈이 심해 1주일동안 충남대학교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거 선생은 9m에 달하는 상량문과 7m에 달하는 중수기를 완성해냈으며, 지금도 그가 필사한 상량문과 중수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인릉 정자각에 봉안된 상태다.

평거 선생은 상량문과 중수기 필사 이후 여러 방송사 뉴스와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유명인사가 됐다. 또 수십 년 전부터 수집해 온 골동품을 한데 모아 평가 민속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그는 수집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자금을 투자했지만 아직도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무료 개관을 유지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수천 점의 골동품 및 유물이 전시된 그의 박물관과 집은 2017KBS ‘생생정보에도 보도됐다.

 

 

그는 개인전 연주 없는 붓가락’(2008) 이후 11년 만에 네 번째 개인전 <먼 길>(2019)을 열었다. 특히 <먼 길> 전시회에서는 그의 서예 작품뿐 아니라 2016년부터 시작한 서양화 작품도 함께 선보였다. 개인전을 네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직도 부족하고 시작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는 평거 선생. 그는 네 번째 개인전을 마친 뒤 바로 이어 서화집 발간을 준비했고 현재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독학으로 배우고 연구해온 나에게 홀로 걷는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어차피 내가 가야 할 길이기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고뇌하며 변화된 내 모습을 찾으려 한길을 갈 것이다라고 전했다.

작품-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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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먹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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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봄이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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