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교육해 나라를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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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교육해 나라를 살리자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0.08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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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가 괴정 오상규 선생
괴정 오상규 선생
괴정 오상규 선생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을 때 일제의 편에 서 같은 민족을 탄압했던 사람도 있었던 반면 또 다른 수 많은 사람은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담아 누군가는 시와 소설을 써내려갔고 누군가는 총과 칼을 들고 전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학교를 짓고 백성을 교육했다. ‘나라가 힘이 없는 것은 백성들의 무지 때문이다. 무지의 타개책은 교육이다가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 초기부터 아낌없이 힘을 쏟았던 사람 중 한 명이 괴정 오상규 선생이다.

괴정 선생은 1858년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고향 회령에서 한학을 공부해 과거에 응시하나 결국 병조판서 조영하의 천거로 처음 관직에 진출한다. 이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조선에 철도가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 철도국장을 맡게 된다. 그는 이후 경인선 개통에 큰 공헌을 했으며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계획 수립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제로 빼앗긴 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충북 옥천으로 이사한다. 전화와 인터넷이 발달해 친구·가족 간의 연락이 어렵지 않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타지로 이사 간 후 만나는 쓸쓸함을 버텨내지 못하곤 한다. 하물며 인편·마편에만 연락을 의존해야 했던 당시 괴정 선생의 결정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의 결정을 통해 조국의 무력함 앞에 느꼈을 좌절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괴정 선생은 옥천으로 이사하기 이전 이미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06년 한북흥학회를 창립했고 회장직을 맡았다. 이후 1908년 한북흥학회와 서우학회를 통합해 만든 서북학회 2대 회장을 역임하고 흥사단과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며 도산 안창호, 유동렬 선생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옥천으로 이사 온 후 학교 설립을 위해 부지를 기꺼이 기부했으며 가뭄이 들었을 때나 수해로 큰 피해가 있었을 때 농민들의 지대를 감액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등 큰 덕을 베풀었다. 또한, 옥천에 내려와서도 자택에 야학을 설치해 계몽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육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그는 1922년 옥천읍 문정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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