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 곽중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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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 곽중규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0.29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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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규 선생
곽중규 선생

 

곽중규 선생은 1891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곽 선생의 아버지인 곽준희 선생은 1907년 의병대의 부장이 돼 군수품과 군자금을 모집했고 1909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심한 옥고를 치른다.
곽준규 선생은 어린시절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몸 바치는 모습을 보며 민족의식을 불태웠다.
그는 1909년 미국인 선교사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됐으며 서울로 상경해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운다. 당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지식인이 부와 명예를 위해 친일행위를 하며 심지어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활동 독려도 서슴치 않았지만 곽 선생은 오직 ‘대한 독립’에 대한 열망만 가졌다.


1916년 옥천으로 돌아온 곽 선생은 자신이 서울에서 배운 지식들을 남과 함께 나누는 데에 앞장섰다. 그 예로 영동에 대서소를 개업해 문맹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이원면에서 동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이 있다.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했단 죄로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루고 나오며 독립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1921년 본래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을 가려 했으나 여권이 나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1922년엔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고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진행하는 동시에 상해교민회에서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로도 재직하며 당시 중국에 거주했던 조선 교포의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심어준다.


1925년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직에 선출된다. 이어 제13회 의정원 회의에서 뜻이 맞는 동료들과 이승만 임시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후 나창헌을 심판위원장으로 한 탄핵심판위원회의 위원이 돼 탄핵안을 심리한 뒤 임시의정원에 보고해 이승만 대통령의 면직을 결정, 국무총리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며 명성사진관·성광사진관 등을 개업한 후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한다.
1931년, 윤봉길 의사를 자신의 사진관이 있는 건물에 은신하게 했으며 동생 곽중선 선생을 통해 윤봉길 의사에게 거사 전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검색과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난징, 충칭 등 중국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온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된 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가출옥 후 톈진에 있는 곽중혁 선생의 집에서 머무르던 선생은   동생 곽중선 선생이 상하이에서 피살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하이 대신 스좌장으로 발길을 돌려 그 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곽 선생은 8·15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소식이 두절됐으며 1950년 사망신고 처리 됐다.
비록 곽 선생의 말로(末路)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여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민족의식은 후대에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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