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가려졌던 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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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가려졌던 그의 행적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1.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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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권태석 선생
권태석 선생은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해방 후 건국을 위한 당 통합에 이바지 했다.
권태석 선생은 1920년대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해방 후 건국을 위한 당 통합에 이바지 했다.

 

1895년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난 몽우 권태석 선생은 경남 함양의 안의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그는 국내외를 오가며 상업에 종사했고 보부상 지방 지부의 일원을 맡기도 했다.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관하기 위해 경성을 방문한 몽우는 그곳에서 일어난 3‧1운동에 크게 자극을 받고 동료 최익환과 동립운동 방법을 모색한다. 그들은 관료 출신 인사들이 만든 독립운동 단체 대동단에 가입한다.


대동단의 목표는 독립만세시위 주최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켜 민족운동진영의 구심점으로 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동단은 일제에게 발각됐고 관련 인사였던 몽우 또한 서대문형무소에서 13개월 가량 복역했다.


출소 후 세계협회 발기, 고려공산동맹 서울파 합세 등 사회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으며 1926년 몽우는 조선민응회 발기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이듬해 신간회가 조직되자 조선민흥회와 신간회의 통합을 논의, 몽우와 최익환 등은 통합을 주도해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국내 운동에 참여했으나 조선 공산당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자 몽우는 서울구파 사회주의자들과 춘경원당을 조직해 독자적 운동노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1928년 일제가 보안법 위반을 내세워 춘경원당 당원을 대대적으로 구속했고 이듬해 몽우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1934년 6월까지 복역 후 출소했다.


이후 그는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 해방 직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독립 후 사회 혼란을 최소화 하기 위한 무경부(武警部) 책임자로 임명됐으며 선전부장으로도 임명돼 교섭도 담당한다.


그러나 여운형이 피습당한 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되자 그는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하고 중도우익 정당통합운동에 참여 최익환·명제세 등과 함께 범우익 통합 운동에 착수해 1945년 말 신한민족당 창당대회에 참석하고 정치국 차장에 선임됐다. 


1946년부터 우익정당 통합운동이 빠르게 진전됐지만 통합에 관한 시선 등으로 인해 분열, 분당기미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몽우는 권동진, 최익한 등 통합파 당 지도부와 당 통합 논의를 지속해 국내 민족진영 통합 정당인 신한민족당과 국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 3당의 합당을 이끌어 냈다.


그는 남북 별개의 정부가 수립될 기미가 보이자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중도파 운동에 합류했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민족자주연맹 소속으로 참가한 후 8월에 두 번째로 상경하던 중 해주에서 갑작스럽게 병사하게 된다.


몽우 권태석 선생은 사회주의계 인사였으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까닭에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가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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