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나 밝혀진 그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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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이 지나 밝혀진 그의 행적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2.1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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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동희 선생
박동희 선생은 어린나이에 청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해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박동희 선생은 어린나이에 청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해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1896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태어난 박동희 선생. 그의 유년기 시절에 대한 행적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지금으로 치자면 이제 막 군대에서 전역해 갓 대학교에 복학할 나이인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2일 고한주 선생 등이 주도해 발발한 청산면 장터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1,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면 소재지 일대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위협을 느끼고 헌병주재소로 피신한 일본인을 보호하던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지키다 발포명령이 내려지자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군중들에게 무차별하게 사격을 시작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 중 5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시위대는 4월 3일 오전 1시까지 계속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4월 4일에도 다시 모여 오후에 수천명의 면민들이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박 선생은 만세운동에 참가해 격렬한 투쟁 끝에 일본 경찰에 검거됐다. 1919년 4월 3일, 그는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으로 이송돼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60대를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갑오개혁, 을미개혁에서 모든 범죄에 대해 태형과 장형등을 폐지하는 방침이 세워졌지만 시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두 개혁이 모두 중단되고 일본은 이를 악용해 조선태형령이라는 제형을 만들어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적용했다.


조선태형령은 형구로 대나무 회초리를 사용하도록 규정했으나 많은 서적과 증언에 따르면 실제론 숫소의 생식기로 만든 형구를 사용했다고 한다. 끝에는 납덩이가 살려 한 대 맞으면 살이 찢겨져 나가고 납독, 파상풍이 올라 후유증으로 고생하거나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
박 선생도 태형을 받은 후 자택에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19년 5월에 사망했다.


이렇듯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불태운 박 선생이었지만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2013년 7월 당시 청산면장을 맡고 있던 신한서 전 면장이 면사무소 서고에서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범죄인 명부’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명부에는 당시 청산 만세운동을 벌이다 붙잡힌 사람들의 성명, 직업, 판결일, 형량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신 전 면장은 주변에 선생의 공적을 알리고 향토사를 조사해 관련 자료도 확보했다. 이어 청산면장으로 부임한 전재수 현 경제개발국장과 청산면민협의회 이갑기 전 회장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선정을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사망 99년 후인 2018년, 박동희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옥천군 청산면사무소 서고에서 발견된 범죄인명부(수형인명부)는 독립유공자 인정에 큰 기여를 했으며 2019년 군은 범죄인명부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에 청산면 출신인 손일만·안소석 선생의 독립유공자 자격인정을 추가 신청했다.


지난해 3월 청산면 3·1운동을 주도한 손일만 선생 또한 범죄인명부를 근거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로 인정됐으나 함께 신청한 안소석 선생은 범죄인명부와 호적자료상 동일인물이 불분명한 것으로 판정,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군은 지난해 1월 국가보훈처에 재신청했으며 신청결과는 올 3월에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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