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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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학자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2.25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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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 남수문 선생
경재 남수문 선생은 일찍 과거에 합격해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경재 남수문 선생은 일찍 과거에 합격해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1408년, 옥천군 양내면 박계리(현재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서 병조판서 남금의 아들로 태어난 경재 남수문 선생은 19세인 어린 나이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사마시를 합격하고 대과 응시 자격을 부여받았다.

대과도 사마시와 같이 3년마다 시행됐는데 경재는 대과에서 차석으로 합격했다.

중요한 점은 대과가 단 한번에 치러지는 시험이 아니었다는 것.

1차 시험인 초시에서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 50명, 서울에서 40명,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했으며 2차 시험인 복시에선 33명을 추려냈다.

또한 3차 시험인 전시를 통해 1등부터 33등까지 순위를 매겨 성적에 맞게 종6품부터 정9품까지 차례대로 관직을 하사했다.

경재는 타고난 천재성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 세종대왕의 특명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만 모인 집현전 학사에 발탁, 젊은 수재로서 세종대왕이 주관하는 연구와 한글 창제, 학문 진흥 등에 몸담았다.

세종대왕은 경재를 불러 “내가 듣건데 너는 연소한 문사로서 오로지 독서에 뜻을 두고 덕을 이루고 도에 나가가기를 기약한다”며 “너의 범상을 뛰어 넘는 규범을 내가 가상하게 여기나 오히려 너의 아침 근무나 저녁 숙직으로 인해 독서를 전문으로 하지 못함을 염려해 특별히 호당을 설치해 제일 먼저 선발했으니 독서할 휴가를 허락한다.

또 유유자적할 것을 명하고 비용을 관에서 지급해 마음껏 학문해 열중하라”고 했다.

일찍이 경재의 천재성을 알아본 세종대왕의 배려였던 것이다.

이후 경재는 1433년에 집현전 부수찬으로서 세종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1435년에  윤회, 권채, 정인지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의 인명, 지명, 고사 등에 설명을 달아 더 쉽고 싶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통감훈의(通鑑訓義)』를 집필해 집현전 부교리로 승진했다.

이듬해엔 29살의 나이로 10년에 1회씩 실시되는 당상관 승진시험인 중시에 장원 급제해 바로 2계급 특진해 집현전·예문관 응교, 지제조, 경연 검토관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승진했다.

1437년엔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의 발문을 썼고 이후 주석서의 발문을 썼다.

경재는 단지 학문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왕에게 첨언을 하는 곧은 성품도 가지고 있었는데 1437년 그는 세종에게 항소를 올려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게 했다.

하지만 ‘천재는 단명한다’는 옛말처럼 경재 또한 장수한 인물은 아니었다.

경재는 집현전에서 숙직하던 중 갑자기 병이 심해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지만 급서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들은 세종대왕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세종대왕은 단지 슬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격적인 대우를 명하는데 바로 국가에서 특별히 종1품 이상 문무관에게 예를 갖춰 장사지내주는 예장을 명한 것이다.

이에 더해 관원을 파견해 장례에 참여하게 했으며 특별히 장례에 필요한 쌀, 콩 등 10석과 문종이 70권을 하사했다.

세종의 아들인 세조는 경재와 함께 세종을 보좌한 것과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다녀왔던 것 등을 회상하며 즉위 후 그를 2등 공신에 봉하고 당상관 정3품으로 추증했다.

숙종 대에는 조선시대 옥천군(현재 영동군) 양산에 호계서원이 설치됐으며 영조대에 지어진 『여지도서』 충청도 옥천군 인물조 등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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