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아놓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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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아놓은 인물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3.25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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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국회의원 정구삼 선생
정구삼 선생은 제헌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국회의 시작을 연 인물이다.
정구삼 선생은 제헌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국회의 시작을 연 인물이다.

 

옥천 출신 제헌 국회의원인 정구삼 선생의 삶은 그야말로 ‘거친 초원을 거니는 신사’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러시아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이 한창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견제하던 1893년에 태어난 정 선생.

그래서 그런지 정 선생의 유년기에 대한 기록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 재학할 때 부터다.

모범적인 학생이자 반듯하고 엄격한 성격을 가졌던 정 선생은 고종대에 설립된 관립 외국어학교인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베이징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정 선생은 중국내에서도 수재들만 모인다는 칭화대학에서 2년간 수학했으며 이후 북경 우정국에서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천진신중신문사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렇듯 외국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던 그였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조국을 향한 애국심이 남아있었다.

그는 고국을 잊지 않고 천친의 한국 교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들어와 단재 신채호와 함께 동국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동국은 중국, 조선, 일본과 주변국가의 전쟁 그리고 교섭 등 대외관계, 외교관계의 변화를 서술한 역사교과서다.

동아시아 3국과 이 3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대립을 서술하려면 분명히 거시적인 관점과 어려운 정세를 쉽게 풀어나가는 문장력이 필요했을 터. 아마 정 선생이 기자로 활동한 이력이 그의 글쓰기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유추한다.

이에 더해 정 선생은 직장에 다닐 때도 항상 단정한 양복차림을 하고 다녀 멋쟁이 신사로 불렸다고 한다.

정 선생은 독립 후 1947년 국민회 옥천군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5월 10일에 열린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 충북 제5선거구인 옥천 선거구에서 압도적인 표수인 11,561표(33.44%)를 득표해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총 6명이 출마한 가운데 33.44%표를 가져간 것으로 보아 옥천 군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헌국회의원은 미군정당국에서 투표와 선출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담당해 진행한 선거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시도한 선거지만 질서정연하게 치러진 선거기도 하다.

1948년 5월 31일부터 1950년 5월 30일까지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 선생은 우리나라 초대 국회의 기반을 닦고 지난 수십년간 왕정-식민지배-민주정으로 연결돼 내려온 정치적 제도 안에서 발생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근간이 되는 법을 만들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정 선생은 1969년 국가나 사회에 공헌해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표창하는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해 그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1979년 서울 동대문구에서 8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어려운 나라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놓지 않고 타국으로의 유학길에 오른 학구열, 타국에서도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진행한 애국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의 초석을 닦기 위해 노력한 그의 행적은 많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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