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 위에 그림이 활짝 피었습니다”
상태바
“도화지 위에 그림이 활짝 피었습니다”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4.08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산노인복지관 수채화반
수채화반 수강생들이 홍승숙 강사의 지도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채화반 수강생들이 홍승숙 강사의 지도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붓을 들어 다양한 색의 물감을 조금씩 찍어내 섞고 물로 농도를 맞춰 도화지 위를 가로 지르면 붓이 지나간 자리에 빛이 생기고 그림자가 생기며 꽃이 피고 나무의 질감이 살아난다.

청산노인복지관 수채화반 어르신들이 붓으로 부리는 마법이다.

예쁜 장미 다발부터 투박한 호박, 나루터에 정박해 있는 배, 꽃, 소나무 등 수강생들이 원하는 주제를 잡아 홍승숙 강사의 지도로 소묘부터 채색까지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수일에서 수주까지 제각각이다.

어르신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자식을 기르는 데 모든 힘을 다 써버려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기도 한다.

하지만 붓을 잡고 물감을 찍는 그 순간만큼은 떨림이 멈춘다.

홍 강사는 “어르신들의 차분하시고 온화하신 성품이 모두 그림에 녹아 나온다”며 “보통 아버님들께선 풍경화를 좋아하시고 어머님들께선 화사한 꽃 그림들을 즐겨 그리신다”고 했다.

어느새 출강 한지도 10여 년이 된 그녀는 처음 온 분들께 도형을 활용해 그리는 기초 소묘부터 상세하게 설명한다.

사물에 비치는 빛과 그림자를 이해하는 것이 그림의 기본 중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후 색을 섞고 물로 농담을 조절하는 법까지 배우면 수채화의 이론적 이해는 끝난 것이다.

이제는 교재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직접 그려보는 시간이다.

생각보다 그림이 잘 나와 미소가 만개한 날도 있지만 생각만큼 그려지지 않아 울상짓는 날도 있다.

“몇 년을 했는데 아직 이 정도 밖에 안된다”고 장난기가 어린 투정을 부리는 어르신께 홍 강사는 “어머님, 이 그림은 작가 그림이에요. 어머님 지금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라고 응원한다.

여든에 수채화를 시작해 벌써 붓을 잡은 지 10여 년 가까이 된 이함무 어르신은 “여러 해 동안 그림을 그려왔지만 붓이 스케치 위를 스치는 대로 빛이 생기고 어둠이 생기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수채화를 잘 그리는 방법은 어쩌면 마음을 비워내는 것일 수도 있다.

‘조금만 더 덧칠하면 지금보다 훨씬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몇 번 붓칠을 더 하다 보면 종이가 물을 너무 많이 먹는 경우가 생긴다.

흔히 말하는 표현으로 ‘종이가 운다, 종이가 일어난다’고 한다.

종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의 물이 표면에 묻어나다 보니 종이가 울룩불룩 해지거나 표면에 부스러기가 생기는 현상이다.

아무리 그림을 오래 그리신 어르신들도 가끔은 종이가 일어나는 현상을 겪는다.

3년 경력의 조영옥 어르신은 “종이가 울면 마치 상처를 보듬어 주듯이 그 자리를 휴지로 잘 다독여주면 된다”고 했다.

이어 “수채화 반에 오는 가장 큰 이유로는 그림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져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사람들과 이런 저런 얘기 하면서 위로를 얻어가기 때문이다”고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어르신의 조카는 현재 미술협회에서 이사장을 맡고 있고 조 어르신의 손녀는 충북대 미술영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주변 사람들이 “조카가 고모를 닮아서…”, “손녀가 할머니를 닮아서…”라는 칭찬에 가끔은 어깨가 으쓱여지기도 한다.

조금은 더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도 있다.

부산이 고향인 조영섭 씨는 수년 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졌다.

한두 군데도 아니고 아홉 군데의 혈관이 터져 눈을 떴을 땐 신체 오른쪽 대부분에 마비가 와 움직이기 힘들었다.

재활을 위해 청산으로 와 사는 그는 5년 전부터 수채화 반에 참여해왔다.

아직은 자유롭지 않은 손이지만 최선을 다해 물감을 찍어 화폭에 옮긴 그는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조금 힘들지만 참여하게 돼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어 “사실 지금도 오른쪽 눈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사물이 겹쳐 보이거나 색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어 선생님께서 가이드로 찍어주신 색을 따라 칠한다”며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뿌듯하고 감격스럽다”고 했다.

청산노인복지관에서 평생교육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맹수현 사회복지사는 “코로나 19 확산 전에는 동아리 활동으로 평일에도 시간 되면 나오셔서 그림을 그리셨는데 요즘은 동아리 활동이 중지돼 많이 아쉬워하시는 것 같다”며 “하루빨리 어르신들께서 동아리 활동을 즐기시는 날이 돌아오면 좋겠다”고 했다.

청산노인복지관 복도에 수채화반 어르신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청산노인복지관 복도에 수채화반 어르신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