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회상을 그린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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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회상을 그린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4.2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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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 ‘단오풍정’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 ‘단오풍정’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돼 일본인 거상 토미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는 화첩의 그림들을 사진으로 찍어 담뱃갑 포장지로 이용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이 화첩을 찾아오기 위해 몇 년 동안 공을 들였다.

결국 1934년 오사카에서 거금을 들여 사들인 후 새로 표구했다.

이때 오세창이 표제와 발문을 썼다.

이 작품은 가로 28㎝ 세로 35㎝ 한지에 그려진 30면 그림책이다.

「청루소일(靑樓消日)」,「월하정인(月下情人)」,「단오풍정(端午風情)」등 주로 한량과 기생의 모습을 세련된 솜씨의 붓질과 아름다운 색깔로 그려냈다.

특색으로는 각 인물의 몸동작과 표정을 비롯한 각종 배경을 뛰어난 소묘력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특히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최대한 살린 색채의 효과적 사용을 통해 당시 풍속상과 풍류 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 나게 전해주고 있다.

18세기 후반 김홍도 풍속화의 성향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소재 선정이나 구성법, 인물의 표현 기법 등 전반에 걸쳐 신윤복의 독보적인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신윤복의 작품은 현존 숫자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나마 국보 135호로 지정된 ‘신용복필 풍속도 화첩’이 있어 그의 그림 수준을 알 수 있다.

이 화첩의 그림은 도회지 기방의 풍속을 담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과거 윤두서, 조영석은 풍속화의 주제를 농가로 했고 단원 김홍도는 서민과 양반을 주제로 했다.

그러나 ‘신용복필 풍속도 화첩’에는 기생과 양반이 등장한다. 하지만 기생이나 양반에 대해 비판적인 면은 없다.

오히려 당시의 풍성한 삶 또는 에로틱한 모습을 풍속화로 기록했다고 봐야 한다.

혜원이 활동했던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반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는 농업 생산력 증대로 인한 유통경제의 발달로 ‘납속(納粟)’을 통한 신분 상승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경제력이 사회적 행세의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 시기였다.

‘신용복필 풍속도 화첩’은 양반의 위세보다 중인의 돈이 더 큰 위세를 떨치고 있는 이 시기, 도시 뒷골목의 분위기를 풍속화로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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