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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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5)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5.13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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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내는 데 선생님은 온종일 걸렸지만, 나는 암산으로 쓰윽 한번 훑어보면 한 시간 만에 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 친구들의 성적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과 한 약속대로 내가 성적을 냈다는 일은 절대 비밀로 했다. 죽을 때까지 약속을 지키리라 마음먹었고, 그런 나를 선생님은 절대로 신임하셨다.

그 비밀을 여기서 털어놓게 된 것을 이제는 선생님께서도 용서해 주시리라 믿는다.

드디어 5학년이 끝나는 날 조례에서 선생님이 우등상 받을 사람 이름을 불렀다.

“송지호!”

가장 먼저 부른 이름, 일등이 나였다. 가슴이 벅찼다. 월반 후 드디어 내가 일등으로 우등상을 받은 것이다. 영이도, 숙이도, 선이도 5학년 우등상은 받지 못했다.

남자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면서 세상이 바로잡힌 느낌이었다. 가난한 내가 우등상을 타게 된 것은 순전히 남자 담임선생님 덕분인 것 같았다. 나는 매사를 옳고 바르게 처리해주시는 정진우 선생님이 그렇게 좋고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상장을 흔들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나 우등상 탔어.”

어머니 앞에 상장을 밀어 보였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빙긋이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비로소 나도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효도한 것 같은 뿌듯함도 있었다. 지금도 노란 눈빛의 쌍꺼풀 진 정진우 선생님 얼굴이 내게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진우 선생님은 나의 어린 동심에 희망을 심어주신 분이다.

꼬마 주산왕, 3급 시험 치러 한양 가다

4학년 때 특활반에 주산부가 생겼다. 호기심 많은 나는 우연히 주산부에 들어가서 주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각반에서 모인 학생들이 처음에는 60여 명이었다.

주산 선생님은 사슴처럼 목이 길고 인형처럼 속눈썹이 길었던 김인영 선생님이었다.

주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산 급수 시험도 치렀다. 7급 시험을 시작으로 6급, 5급, 4급으로 단위가 높아지면서 학생들은 점점 떨어져 나갔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4급 합격자 5~6명만 남게 되었다.

내 주산 실력은 충청남도 주산 경시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모든 종목에서 상을 받았다. 호산 가산, 호산 암산, 계시 암산 등 각 종목에서 입상했는데, 특히 계시 암산, 호산 암산 등 암산 종목에서는 항상 1등을 차지했다.

주산대회에 나가기 전, 김인영 선생님은 우리를 선생님 댁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였다.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선생님 댁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싶어 하는 사슴처럼 큰 눈을 가진 선한 선생님을 나는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내게 3급 시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3급부터는 시험단위도 높아 4급과는 달리 어려웠고, 시험도 서울에 가야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와 남학생 이경남에게 시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내 경남이는 3급의 고단위 암산 시험에 자신이 없다며 스스로 포기했다. 나 홀로 남게 된 것이다.

드디어 선생님과 나는 3급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수학여행을 덕수궁으로 간 적이 있으나 나는 차마 엄마한테 수학여행비를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기에 나로서는 첫 서울 나들이였다.

시험장소는 덕수상고였다. 시골 선생님과 시골뜨기 학생은 덕수상고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시험장소를 찾아가 빈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교실에 앉아 보니 전국에서 온 3급 시험 지원자 중에 초등학생은 나 한 명뿐이었다. 유난히 체격까지 작은 내가 어른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었던지 나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몰려들어 에워쌌다.

그도 그럴 것이 3급 이상은 최소 상업고등학교 이상, 일반인들이 보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꼬마야 너 주산 할 줄 아니?”

“너 어디서 왔냐?”

“너 진짜 3급 보러 온 거야?”

“주산 한번 놔 볼래?”

심지어 주산 교재까지 펼쳐 보이며 주산을 한번 놔 보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주눅들 내가 아니었다.

“좋아요. 해볼게요.”

나는 오히려 신나서 책을 펴고 주판알을 튕겨 나갔다. 그들은 내가 주판알 위를 오가는 손가락을 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인 듯 신기해했다.

사실 3급부터는 암산 단위가 만 단위로 4자리 수 이상이었고, 호산 가산도 십만 단위 이상이어서 매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은 대개 잘해야 최고 4급이었다. 그런데 작은 체구의 어린 내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시험을 본다는 것은 아마도 어른들에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로 보였다.

그날 본 3급 시험에서 합격한 후 주산을 더는 계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배운 주산 실력이 평생 큰 도움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 문제는 거의 암산으로 다 풀었다. 그래서 시험시간이 반 이상 남아있을 때, 나 혼자 시험지를 가장 먼저 제출하고 나오곤 했다.

한번은 선생님으로부터 풀이 과정 없는 답이 어디 있느냐며 0점을 맞기도 했다. 암산으로 문제를 풀다 보니 식이 없어 생긴 해프닝이었다. 답은 다 맞았는데 빵점을 준 것이다.

평생 교수로 학생 성적을 낼 때도 나는 여전히 암산으로 냈다. 덕분에 다른 교수들이 며칠 동안 끙끙대는 일을 나는 몇 시간에 마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주산과 암산 능력은 내게 축복이었다.

슈퍼마켓에서 물건값을 계산할 때도 마찬가지다. 계산원이 계산을 끝내기도 전에 먼저 나는 계산한 금액을 내민다. 계산원이 짜증을 내며 기다리라고 하다가 정확한 총액에 놀라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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