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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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향수신문’ 시리즈 ‘성취가 성공보다 행복했다’(6)
  • 송지호 성신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5.20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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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셨어요?”

교수들과 해외에 나가서도 환율로 계산한 우리 돈 액수를 즉석에서 알려주곤 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 나는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가진 적이 없다. 직장, 친구, 친지, 친척 등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번호는 모두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입력된 전화번호는 10, 20년이 지나도 거의 잊지 않고 기억한다. 심지어 우리 교수들은 물론 병원 직원들, 외부 교수 등 나와 만나는 사람들의 자동차 번호까지 외우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교수는 내가 무섭다고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휴대전화에 번호들이 저장되어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계산은 암산이 훨씬 빠르고 편하다.

천하의 말괄량이였지만 착한 아이

월반 후 한때 왕따 당하면서 힘들게 지내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괜히 월반을 시켰나보다고 후회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죽어 지낸 기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1등을 해도 우등상을 받을 수 없었던 3, 4학년을 지나 남자 선생님을 만나면서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본래 내 성격이 적극적이기도 했지만, 잘하고 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을 때의 실망에서 벗어나면서 내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다. 6학년 때 학년회 부회장으로 당선된 것도 그런 성격의 결과였다.

당시 전교학생회 회장은 남학생이, 부회장은 여학생이 맡았는데, 허성도가 회장, 내가 부회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나는 친구들과 잘 놀았고,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무엇에든 지는 일이 없었다. 눈싸움하다 내게 눈 뭉치를 던지고 교실로 도망가는 남학생을 교실까지 쫓아가서 기어이 항복 받고야 마는 여자아이가 나였다.

동네 남자아이들과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나는 항상 이겨야 했다. 그러는 나를 보며 엄마는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계집애가 그렇게 선머슴 같아서 어쩐다니? 시집이나 가겠냐?”

이렇듯 나는 선머슴 같았고, 골목대장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바느질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공부 잘하는 것만이 그 고생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마친 옷을 시장상점에 가져다주고 새로 바느질감을 받아오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악착같이 다 받아왔다. 바느질감이 너무 많을 때 상점 아주머니는 내게 물었다.

“무거울 텐데 네가 다 가져갈 수 있겠니?”

“그럼요, 다 가져갈 수 있어요.”

나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감을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많아도 가져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시장을 나와서 겨울 눈길을 조심스럽게 디디고 걸었다.

이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머리가 앞뒤로 흔들렸지만, 미끄러운 바닥을 내려보지도 못한 채 걸어야 했다. 그 보따리가 우리 식구 먹고사는 일감이었기에 무거워도, 고개가 아파도, 온몸에 경련이 일어도 참고, 이를 악물고 집까지 참고 왔다.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가 뛰어나와 받으며 너무 많이 가져왔다고 야단을 치셨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아무리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어머니 마음속으로는 안쓰러움에 울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재미있게 놀다가도 어머니 심부름은 군소리 없이 했다.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있어도 어머니께 바로 말하지 못했다. 내가 돈 달라고 했을 때, 집에 돈이 없다면 어머니 마음은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못 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선생님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아이들에게 창피당할까 봐 두근거렸지만, 그보다는 못 주는 어머니 마음이 더 걱정되었다. 그러다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엄마, 오늘은 돈을 내야 해요. 나만 안 낸 것 같아.”

“진작 얘기하지, 왜 말을 않고 있었어?”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중학교 다니는 오빠에게 급한 일이 생겨 어머니는 동생만 데리고 급히 서울로 가시면서 옆집 아주머니께 나를 부탁하고 가셨다. 하지만 나는 아주머니 도움 없이 밥도 내가 직접 할 참이었다.

쌀독을 열어보니 중간쯤 쌀이 차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밤늦도록 바느질해서 번 돈으로 산 귀한 쌀을 아까워서 도저히 푹 퍼낼 수가 없었다. 겨우 한 주먹만 쥐어서 그릇에 담고는 다시 쌀독을 손바닥으로 판판하게 두드려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쌀을 아끼겠다는 마음에 밥을 먹지 않고 그냥 등교했다.

마침 그때가 겨울이었다. 학교에 갔는데, 갑자기 온몸이 떨리고 열이 나서 조퇴를 해야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누워있었다. 곧 돌아오신 어머니는 누워있는 나를 보며 불같이 화를 내셨다. 쌀독을 열어보고 내가 거의 먹지 않고 지냈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때 내 나이 8살이었다. 소문난 동네 말괄량이인 내가 어머니에 대한 효심만은 어린 여덟 살이 아니었다.

너는 꼭 한밭여중 테니스 선수가 되어야 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입학원서를 쓰게 되었다. 당시 대전에서는 대전여중과 한밭여중을 첫 번째와 두 번째 좋은 학교로 꼽았다. 그때 언니는 한밭여중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 역시 머리가 좋아서 중학교에 입학한 후 줄곧 전교 1등과 학생회장을 하며 선생님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었다.

송씨 집안이 그림 잘 그리고, 글씨 잘 쓰고, 글 잘 쓰는 유전자가 있는지 언니도 그림을 아주 잘 그려서 미술대회에 나가면 항상 입상했고, 글씨도 달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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