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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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0)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5.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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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守令)이 마시는 술은 백성의 피

어느 날 조헌이 관찰사 정철과 강진(康津) 지방을 순시할 때 청조 누상(聽潮樓上)에서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이 누각은 바다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호남의 경관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관찰사 정철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곧이어 주연이 베풀어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러나 조헌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이때 정철이 술잔을 주면서

 “오늘은 경치가 아름다워 술을 마실만한데 왜 한사코 사양하시오”하면서 적극적으로 술을 권했다. 조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잔을 뿌리치고는 “어떻게 백성의 피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그는 끝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정철도 조헌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뒷날 정철이 해남현(海南縣)에 지인을 방문하게 됐는데 주인이 그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다. 이때 정철은 술에 취해 이런 시를 지었다.

傍人莫笑酩酊醉 주위에 임자들 내가 취했다 웃지 마오

此酒應非赤子血 이 술은 백성들의 피가 아닐세

이는 일찍이 조헌이 정철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충고하며 수령된 자가 마시는 술은 백성의 피라고 말한 것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교분이 두터워져 갔다. 후에 조헌은 “내가 타인으로 인해 잘못했으면 공을 잃을 뻔했다”고 진심으로 정철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친교가 있었던 김우옹 등과는 틈이 벌어지게 됐다.

그 시대에는 동서 당쟁으로 분열이 극심했다. 율곡은 이를 융합하려고 노력했으나 오히려 서인으로 몰리는 등 당쟁은 날로 격렬해져 가고 있었다. 조헌은 전라도사로 있으면서도 스승이 처한 어려운 현실이 안타까워 율곡에게 한 수의 시를 지어 보냈다.

氷炭元難合 얼음과 불은 본디 합칠 수 없으니

朱林豈相調 주자(朱子)와 임률(林栗)이 어찌 화합하리오

大老思渭上 대로(大老)께서 위수(渭水)에 뜻을 두시니

陽道恐漸消 군자의 도가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조헌이 전라도사로 있던 기간은 남쪽 지방의 사정을 익히는 중요한 기회였을 것이다. 각 고을을 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고 남쪽 지방의 지리를 소상히 살펴보고 익혀둘 수도 있었다. 그때 강진 땅 만경루(萬景樓)에서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岡巒如畵水如灣 그림 같은 산과 언덕에 물은 굽이져 흐르고  

湖界蒼茫一望間 호수는 아득히 한눈에 들어오네

恰似重峯三月暮 큰 산봉우리는 삼월의 저녁 같은데

臨江遙對兩京山 강 가에서 멀리 양경산을 마주하네

어느덧 해가 가고 전라도사의 임기가 끝나 다시 한양으로 올라오게 됐다. 전주에서 한양으로 오는 길목에 공산(公山, 공주)이 있다. 공주에는 고청(孤靑) 서기(徐起, 1523~1591)가 계룡산에서 서원의 원장으로 강학을 하는 곳이다. 서기는 비록 천한 신분의 출신이었지만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실용적 학문에 힘쓰는 분이었다. 조헌은 이러한 서기를 경대하며 교우하고 있었다. 그는 시 한 수를 지어서 차마 들르지 못하고 지나치는 심정을 전했다.

德人心眼定何如 덕있는 사람의 육안이 어떻게 정해졌기에

泉石膏肓想未祛 천석(泉石)으로 고황(膏肓)을 없애지 못하는가

諍對雲山供嘯咏 고요히 마주하는 구름 산 휘파람 불고 읊조리며

新開蝸室展圖書 새로이 방을 열고 책을 펼치누나

冠童日見昏蒙豁 어른과 어린 학생들은 날로 어리석음이 열리고 

侯伯時詢弊瘼除 고을 원님도 때때로 폐해 없앨 방도를 묻네

悵我方憂將母急 슬프게도 나는 막 어머니의 급한 일이 근심돼

蹇驢不克造門閭 저는 나귀타고 서당 문에 나아가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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