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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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같은 말씀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21.06.0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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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곱다. 고와, 참 곱다!”

꽃만 보면 환한 얼굴로 하시던 감탄사.

오월 하늘 달빛 같은 어머니의 말씀이 오월 햇살로 퍼져온다.

“얘야! 울타리에 올해도 인동초 꽃 넝쿨이 실하고 이쁘더라.”

전화 말미에도 언제나 계절의 꽃들을 덧붙인다.

사월이면 뒤꼍에 복사꽃이 만발한다. 휘어진 가지마다 두근두근 맺힌 꽃망울들이 일제히 눈을 뜬다. 어머니는 기분 좋은 날에는 우리를 나무 밑에 세워두고 가지를 툭 치기도 했다. 꽃잎들이 ‘후두둑’ 머리 위로 눈꽃처럼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환호를 하며 눈꽃을 잡으려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활짝 웃고 있던 어머니 입술도 복사꽃 잎처럼 예뻤다.

봄날이면 어머니는 텃밭에 상추, 쑥갓 등 각종 씨앗을 뿌렸다. 어린 우리를 돌보듯 물도 주고 잡초도 뽑아줬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상추가 깨끗이 씻겨 소쿠리에 가득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늘 오 남매를 둥근 밥상 앞에 둘러앉혀 놓곤 하셨다. 아직은 작은 상춧잎을 여러 개씩 포개 밥을 넣고 된장에 박았던 무장아찌를 조금씩 넣어 상추쌈을 싸서 오 남매 입에 하나씩 돌아가면서 넣어 줬다. 그러면서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꿀벌 소리처럼 윙윙거린다.

“자 보렴. 엄마가 너희들에게 무엇이든 똑같이 나눠주지?” 하시며 덧붙이던 말, “왜 콩이 두 조각인지 아니? 우리나라 속담에는 콩 한 조각도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의미로 둘로 나뉘어 있단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가족끼리 도우며 살아야 한다.”

밥상머리 교훈을 몸소 실천했던 어머니였다. 그리곤 다 빈 밥그릇에 묻은 몇 알 남은 밥알을 긁어 뜬 빈 수저를 상추 한 움큼에 싸서 한입에 넣고 우물우물 달게 먹었다.

요즘은 먹을 것이 지천으로 남아 버리기 일쑤지만 그 시절은 먹을 것이 없었다. 상추가 커서 대가 생기면 그 대를 잘라 껍질을 벗기고 하얀 물이 흐르는 속대를 약이라며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상추가 천연 수면제이고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을 커서야 이제 알았다. 쑥갓도 가지를 잘라 먹으면 그 가지가 퍼져 탐스러운 노란 꽃이 수북이 자랐다. 그러면 그 꽃을 한 움큼 따서 병에 꽂아 오빠 책상에 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면 잠자리에 누워 어머니가 들려 주던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던 기억. 그 줄거리를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콩쥐 팥쥐’ , ‘어느 가난한 소금장수 이야기’ 등, 어쩌면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정서를 가질 수 있던 것도 어머니의 덕분이 아닐지. 지금도 상추만 보면 그때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는 꽃처럼 화사했던, 젊었던 당신의 계절에 나빠진 건강을 어쩌지 못하고 짙은 그림자로 누웠다. 석삼년 동안에도 하늘은 몇 번이나 피었다 진다. 또 한 계절마다 꽃은 피었다 진다. 그러는 사이에 움푹움푹 도랑이 패이고 그 곁으로 계절의 꽃들은 수북이 피었다 진다.

오 남매의 자식들을 오매불망 꽃으로 키우신 어머니. 깊은 가슴 속에 묻어뒀던 당신 말씀의 씨앗을 내 텃밭에 뿌리고 가꾸며 나도 어머니 돼 그 자리에 그렇게 그 꽃을 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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