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자존을 지킨 독립투사
상태바
대한민국의 자존을 지킨 독립투사
  • 강형일기자
  • 승인 2021.06.17 1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운 전좌한 의사
사운 전좌한 의사

애국지사 전좌한 의사의 호는 사운(沙雲)과 단여(壇如)이다. 전 의사는 1899년 4월 풍운이 감도는 구한말,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아버지 전보현과 어머니 문화류 씨와의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옥천에서 세거(世居)한지 600여 년이나 되는 유서 깊은 옥천 전 씨로 고려말에 개성 부근에서 옥천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조선 초기 조정에서 온갖 탄압과 협박에도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성심을 굽히지 않고 조선의 신하됨을 거부했던 당대의 거유(巨儒)인 전동(全棟) 진사의 17대 후손이며 18대 조상인 전의강 선생은 146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전좌한 의사의 고조부되는 전홍권은 조선 후기에 공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전재신은 선략장군 훈련 판관, 작은 할아버지는 전재민으로 참봉을 지냈다.

전 의사의 집안은 옥천 구읍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하지만, 전 의사의 할아버지 전재신과 아버지 전보현이 일찍이 광산업에 뛰어 들어 많은 재산을 날렸다. 전재신은 개화기에 일찍 눈을 떠 우리나라 금광 광산권이 일제에 수탈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많은 재산을 투자하여 한국인 스스로 광산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제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일제는 교묘한 방법으로 광산주에 대한 행정적 압력과 광권을 탐낸 일본인들의 노골적인 방해공작, 판로의 문제, 광산에 대한 지식부족 등으로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버지 전보현은 일본인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엽인 구한말의 혼란한 시대임에도 개화에 일찍 눈을 뜬 작은 할아버지는 좌한을 1910년 4월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켜 초등교육을 받게했다. 이 학교는 1906년에 독립운동가 김규흥 선생이 사재를 털어 사립 창명학교를 운영해 오다 대한제국 학부에서 경술국치 한 달 전에 학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옥천군내에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로 정지용 시인이 함께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오늘날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전 의사는 20세를 전후하여 스스로 가슴 속에서 치솟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실천하는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2년 반포된 일본의 토지조사령에 응하지 않았던 그의 부친이 옥천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아 폐인 지경에 이른 사건이 전 의사가 조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게 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20세인 1920년에 이미 납세불문납 문서의 배포 문제로 일제에 투옥되어 1년의 옥고를 치뤘으며 29세에는 조선총독부를 두 번이나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신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만주독립군 창의단과 조선혁명당 대본영의 주역으로 조선총독부 등 주요 관청 폭파작전을 펼치며 옥중에서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과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꽃다운 청춘을 불살랐던 전 의사는 대한민국의 자존을 지킨 독립투사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애국지사이다.

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받은 전 의사는 피폐해진 몸과 정신이상으로 폐인 지경에 이르러 가족들의 생활은 아주 비참했다.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생활이 어렵자 행상하는 부인과 함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장남 원표와 형표는 해방 직후 병으로 죽고 3남 이표는 6·25 전쟁에 참전하여 강원도 인제 전투에서 전사했다. 또 류씨 부인이 휴전 직전에 병환으로 사망하자 고향 옥천 구읍에 돌아와 동생과 이웃들의 도움으로 겨우 연명하다 김귀섬 여사를 만나 재혼하여 말년을 서울과 인천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1986년 4월 사망했다. 전 의사의 묘소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 낙원공원묘지에 묻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