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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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23)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6.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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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을 떠나 옥천 산골에 은거

대간의 모함을 받은 조헌이 보은 현감에서 파직된 것은 1584년(선조 17년) 겨울이었다. 그가 관직을 떠나 복잡한 세상을 등지고 은둔지로 선택한 곳은 보은현과 회인현이 접경한 옥천 안읍 도래밤티라는 인적없는 으슥한 산골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옥천군 안내면 용촌리로 면 소재지에서 도율리 고개를 넘어 약 6km 정도 떨어진 산골이다. 그가 지은 상량문에 의하면 “곁에는 사원도 없고 실가는 멀도다”라는 기록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골 외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궁벽한 이곳이 당시에는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그는 작은 하천 위의 아늑한 곳에 식구들이 거처할 움막을 짓고 그 아래에 후율정사를 짓는다. 청렴하게 살아온 그에게는 작은 정자 하나를 짓는 일에도 힘이 부쳤다. 그가 상량에 “정암충효 퇴계학 일맥 소소석담(靜庵忠孝退溪學一脈昭昭石潭)”이라고 썼는데, 이는 정암 조광조의 충·효와 퇴계 이황의 학문이 일맥을 이루어 석담에 있다는 뜻으로 도통이 율곡 이이에 이어져 여기에 이르렀음을 이른 것이다. 자신이 율곡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량문을 지었다.

“봉산의 북쪽 노악의 한 가닥이 남쪽으로 굽어 내렸도다. 하나의 원천은 도도한 물결이 되어 바다를 연결했고 네 개의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울울한 숲이 하늘을 가렸도다. 산골짜기 깊숙하여 비록 살 수는 있겠으나 너무 황적하여 풍교가 없을까 걱정되도다. 또한 물과 땅은 좋으나 오래 으슥했으니 사람들은 재지를 안고 거의 고락했도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임금은 멀리했으나 어버이를 근심 없게 했도다. 태고시대의 순박함은 비록 가상 하나 풍속을 교화하는 서륜(영락하여 떠돌아다님)이 두렵도다. 자제들이 견문이 없으니 부모들이 크게 근심하도다. 나의 천한 자취는 이곳에 우거 하노라. 그러나 자신이 이미 혼우하니 사람들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벗들이 늘 찾아오건만 성의를 다하지 못했도다. 두세 개의 서까래를 바위에 걸쳤으니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민망하도다. 곁에는 사원이 없으며 주위의 실가는 멀도다. 오직 인재의 양성에 뜻을 독실히 했으며 후생들을 이끌어 도와주는 긍분을 위하여 서제를 세우게 되었도다. 산기슭에 서 있는 이 모옥은 오직 비바람의 표요를 막았도다. 건립할 때는 재력이 궁핍하여 온갖 곤란을 겪으면서 일을 이루 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바에 오는 선비들이 계속 있게 되었으니 어른과 아이가 모두 기쁜 경사를 함께하리라.”

후율정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으나 사람들은 유상지석에서 가까운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후에 후율정사는 이설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은 안내면 도이리에 후율당이란 이름으로 충청북도 지정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사람들은 중봉 조헌이 첩첩산중의 도래밤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하여 오지라서 은거하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고 자신의 선조들이 살던 배천의 율원이라는 지명과도 유사해서라고도 한다. 그의 선조들은 황해도 배천 율원 치악산 근처에 살았다. 그리고 그가 존숭하는 스승의 호가 율곡이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조헌을 이곳 뒷산을 중봉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태어난 김포 감정리 생가가 바로 중봉산 기슭에 있었으니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추억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후에 사람들이 조헌 선생을 중봉이라고 부른 것 또한 이러한 사연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학덕 있는 선비들과 지내면서 학문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가끔 밭에 나가서 동복의 하는 일을 보살피기도 하며 자연과 노니다가 돌아오고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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